춤과 음악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원초적인 해방의 언어다. 리듬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구르는 순간, 우리는 사회가 부여한 이름표와 위계를 내려놓고 의미 있는 존재로서 실존의 감각을 회복하게 된다. 그렇기에 예술은 언제나 지친 인간의 너그러운 피난처이자, 세상의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부드러운 전복의 장이었다.
뉴스에는 연일 드높아진 국가 위상과 ‘K-콘텐츠’를 위해 투입한다는 엄청난 예산 등 장밋빛 헤드라인이 가득하다. 부산에서는 전임 시장이 예술계의 반발을 무시하며 추진하던 퐁피두 미술관 유치나, 단 3회 공연에 105억 원을 쏟아붓겠다던 라스칼라 극장 초청 계획이 재검토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린다. 겉으로만 보면 분명 반가운 변화다. 그런데 이런 축제의 한가운데서 무대와 연습실에서 마주치는 예술가의 얼굴에는 왜 피로와 소외의 그늘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일까. 이 기시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권력이 춤과 음악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복기할 필요가 있다.
보수적 규율 사회에서 인간 신체는 국가 생산성이나 가부장적 질서를 위해 정교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부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순간, 그 공간은 포스트 아나키즘 작가 하킴 베이가 말한 ‘일시적 자율 구역’으로 변모한다. 미셸 푸코의 관점에서 이는 국가의 생체 권력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이다. 위정자들은 이런 에너지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영국 대처 총리 이후 존 메이저 내각이 1994년 제정한 ‘형사사법 및 공공질서법’이 ‘반복적인 비트로 구성된 음악’을 야외에서 틀지 못하도록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게 한 것이나, 나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유대인의 정신이 깃들었다며 재즈를 퇴폐 음악으로 낙인찍고, 스윙 리듬에 맞춰 춤추던 ‘스윙 청년단’ 멤버들을 수용소와 군대로 보낸 것도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1926년 제정해 2017년까지 91년간 뉴욕 시민의 춤출 권리를 묶어두었던 인종 차별적 ‘카바레 법’,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까지 자로 재며 대중문화의 숨통을 조였던 1970년대 유신 정권의 긴급조치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통제는 언제나 인간의 영혼을 ‘길든 국민’이라는 규격 안에 가두려는 폭력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21세기의 행정 권력이 예술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국가는 더 이상 곤봉을 들고 클럽을 급습하거나 금지곡 목록을 발표하지 않는다. 대신, 성과 지표와 엑셀 시트라는 훨씬 교묘하고 차가운 도구를 손에 쥐었다. K-콘텐츠의 글로벌 비전을 보고하는 국무회의 자리에 한국 예술의 기초를 떠받치고 있는 순수예술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과거 독재 정권이 춤과 음악을 금지했던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론적 폭력, 즉 ‘소거’이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예술, 당장 글로벌 마켓에서 수백억 매출을 올리지 못하는 예술은 현재의 국가 시스템 안에서 아예 태어나지 않은 존재 취급을 받는다. 과거 권력이 노래하고 춤추는 신체를 감옥에 가두었다면, 오늘의 권력은 춤출 수 있는 무대의 바닥을 제한함으로써 예술가의 숨통을 조인다.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파워는 ‘감사 사회’에서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측정할 수 있는 성과로만 평가하려 드는 강박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시정이 교체된 부산의 풍경 역시 이러한 계량화된 폭력에서 예외가 아니다. 수백억 원의 혈세가 투입되는 전시성 대형 사업과 메가 이벤트를 포기하자는 데, 야당이 다수인 시의회가 딴지를 거는 사이에 오랜 시간 갈증에 시달린 애타는 지역 예술은 소외되고 있다. 선거철마다 예술인의 굳은 손을 마주 잡으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던 정치인들은 당선증을 쥐는 순간 약속이나 한 듯 기억상실증에 빠진다.
정치적 망각과 자본의 논리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호흡을 이어가는 예술가의 숭고한 노동에 이제는 응답해야 할 때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낡은 연습실에서 빚어낸 작은 움직임과 선율이 지친 이웃의 삶을 치유하는 기적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술의 진정한 생명력은 화려한 포장지가 아닌 그들의 치열한 숨소리에 깃들어 있다. 번지르르한 외래종 꽃을 심어 도시의 겉모습을 치장하기 전에 척박한 토양을 맨몸으로 견디며 피어나는 우리 발밑의 꽃들에 먼저 안온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일회성 이벤트에 집중된 막대한 예산의 방향을 틀어 곳곳의 소규모 창작 공간을 지키고, 예술가가 생계 위협 없이 작업에 매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창작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술가의 호흡이 차가운 행정의 논리 앞에 지워지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한다. 인간을 온전히 인간답게 만드는 근원적 해방의 언어, 그 자유로운 춤과 음악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를 수 있도록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사회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