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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김지윤 소리연구회 소리숲 대표

  • 김지윤 소리연구회 소리숲 대표
  •  |   입력 : 2026-07-26 19:27:05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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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특별기획전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에 전하노니’에 전시된 정조 화성행차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지금 부산에서 한국 최초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벡스코 한국관에서는 한국 국가유산의 아름다움이 세계인을 맞이하고 있으며 부산박물관 특별기획전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萬世)에 전하노니’에서는 우리나라 국보와 세계기록유산이 지닌 묵직한 무게감을 실물로 마주할 수 있다. 흔히 기록유산이라 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문서 기록을 떠올리기 쉽다. 한국은 20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세계적인 기록유산 강국이다. 이러한 기록문화는 문자에 머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음악의 영역에까지 깊숙이 뿌리내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도 600년 전 세종 시대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그 중심에는 세종 시대에 창안된 정간보가 있다. 정간보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칸에 음의 길이를 정밀하게 표기할 수 있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유량악보 가운데 하나로, 박자와 장단을 칸의 수와 분할로 시각화한 혁신의 독창적인 기보법이었다. 정간보가 있었기에 세종 시대의 궁중음악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다.

조선 음악 기록의 진가는 국가가 편찬한 관찬악보와 선비들이 자율적으로 남긴 사찬악보가 공존했다는 데 있다. ‘세종실록’ 악보와 ‘대악후보’ 같은 관찬악보, 그리고 ‘악학궤범’ 같은 종합 악서가 왕실의 제례와 연향에 쓰인 음악을 공적으로 정리했다면 ‘금합자보’와 ‘양금신보’ 같은 사찬악보는 선비들이 즐긴 거문고 음악과 풍류를 민간의 기록으로 남겼다. 국가와 개인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조선의 소리를 기록하며 음악 전승의 두 축을 이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대왕의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와 같은 도상 기록에는 행렬 속 악대의 위치와 악기의 종류, 복식까지 담겨 있다. 정간보가 음악의 시간 구조를 기록했다면 악서와 의궤는 음악이 울리던 공간과 사람의 움직임까지 기록했다.

서양에서도 음악의 기록과 보급은 문명의 중요한 전환을 이끌었다. 특히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쇄와 출판 기술이 발전하고 피아노가 중산층 가정에 보급되면서 교향곡과 오페라는 두 손이나 네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편곡 악보로 출판되었고, 소품집과 연습곡도 대량 보급되면서 악보는 전문가의 전유물에서 일상의 교양으로 확장되었다.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을 비롯한 명문 음악 출판사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바흐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출판하고 보급하며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조선이 기록의 깊이를 발전시켰다면 유럽은 기록의 확장성을 발전시킨 셈이다.

우리 음악의 기록 역사는 일제강점기 왕실 음악이 사라질 위기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왕직아악부의 악사들은 궁중음악을 정리하고 서양의 오선보로 채보했다. 여기에 유성기 음반을 통한 녹음이 더해지면서 당시 궁중음악은 소리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이왕직아악부 정간보와 오선악보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4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세종 시대의 음악과 베토벤의 교향곡을 함께 들을 수 있는 것은 수백 년에 걸쳐 이어진 기록의 힘 덕분이다. 악보는 단순히 음을 적은 종이가 아니라 사라지는 소리를 시간 밖으로 꺼내 미래로 보내는 문명의 기억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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