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충북 괴산의 한 산림 조림지에서 풀베기 작업을 하던 20대 외국인 노동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구급대가 급히 이송했으나 청년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사인은 열사병(Heat stroke). 낮 최고기온이 32도를 웃돌던 날, 지자체가 위탁한 공공사업 현장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 청년의 죽음은 일터의 폭염이 아직도 위협적인 노동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건설 현장의 거푸집 안, 뙤약볕에 가열된 물류단지의 컨테이너 사이에서 발생한 폭염 재해 사례들은 언론에 상기되곤 한다. 기후변화로 우리나라의 여름은 해마다 더 뜨겁고, 더 길어지고 있어, 일반 시민에게도 폭염은 일상을 위협하는 재난이 되었지만, 생계를 위해 온몸으로 볕을 받아내야 하는 노동자에 폭염은 생존을 건 사투에 가깝다.
특히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고리인 이주노동자에 폭염은 차별적이다. 이들 중 많은 이가 산속 오지나 드넓은 농가 한가운데처럼 식수 조달조차 어렵고 그늘막 하나 없는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작업장뿐만 아니라 이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고 체온을 식혀야 할 거주시설은 여전히 조립식 패널이나 컨테이너로 급조된 경우도 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밤새 찜통 같은 방에서 열대야를 버텨낸 이주노동자의 몸은, 다음 날 이미 회복 불능의 ‘열 빚(Heat debt)’을 진 채 다시 일터로 향한다.
얼마 전 언론은 ‘올해 벌써 온열질환 산재 사망자만 4명’이라고 보도했다. 사실 이 통계의 이면에는 시간 착시가 숨어 있다. 고용노동부의 설명에 의하면 올해 산재 승인을 받은 이 사망자들은 사실 올해 쓰러진 이가 아니다. 바로 지난해 여름 폭염 속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에 대한 뒤늦은 청구서인 셈이다. 뉴스에서 접한 숫자는 ‘지난해의 비극’일 뿐이며, 진짜 올해의 피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채 일터에서 쓰러지고 있고, 2027년 그 청구서가 우리 손에 도달할 것이다.
신체는 온도 앞에서 무력하다. 심부 체온의 마지노선은 섭취와 배출의 균형이 깨지는 40도 전후다. 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뇌의 체온조절 중추가 기능을 상실한다. 고열로 장기가 ‘익어버리는’ 다발성 장기 부전 상태로 이어진다. 치사율이 최대 50%에 달한다. 습도가 높은 한국의 여름철에는 땀을 통한 증발 방열마저 차단되므로 생리적 방어 기전이 훨씬 더 빠르게 무너진다.
폭염 속에서 가장 위험한 현장은 단연 직사광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곳, 그리고 환기가 되지 않는 실내 물류창고나 제철소 같은 고열 작업장이다. 정부가 산업안전배포하는 ‘물·그늘·휴식’이란 핵심적 행동 요령은 습도를 반영한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인 ‘주의’ 단계에서는 매시간 10분, 35도 이상인 ‘경고’ 단계에서는 매시간 15분씩의 휴식을 강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38도를 넘어서면 옥외 작업을 전면 중지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이 기준들은 강제성 없는 권고에 그치기 일쑤이고 노동자들은 쉴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 않다. 형식적 가이드라인을 넘어 노동자가 위험을 느낄 때 작업을 멈출 수 있는 실제적 방안을 사회적 논의 테이블에 올려 다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점점 늘어나 이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동반자가 되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더는 사회적 약자여서는 안 된다. 쾌적한 숙소 환경을 비롯하여 일터, 삶터 전반을 아우르는 보건학적 접근을 통해 우리나라 생산 현장의 기둥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도 관계되어 있는 핵심 과제다.
기후위기는 이제 인류 공통의 과제이지만, 그 위기가 초래하는 고통의 무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폭염은 노동자의 체온을 타고 흐르는 사회적 양극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날씨를 바꿀 수 없다면,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온도가 오르면 노동은 멈추는 것이 맞다. 그것이 2026년의 상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