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7일, 국내 최초의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건설부지로 부산 기장군 고리 원자력본부가 최종 확정됐다. 기장은 1978년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용 원전인 고리 1호기가 첫 불을 밝혔던 역사적인 곳이다. 이로써 기장은 AI 시대의 핵심 전력 엔진이 될 차세대 원자력 기술인 SMR을 세계에 선보일 실증 무대로 또 한 번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와 함께 경북 영덕군 옛 천지 원전 부지에는 대형 원전인 APR-1400 2기가 들어설 예정이다.
당초 기장군은 SMR을 놓고 경주시와, 영덕군은 대형원전을 놓고 울주군과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였다. 이 팽팽한 저울질 속에서 두 지역이 최종 낙점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 열쇠는 다름 아닌 ‘지역 주민의 높은 수용성’이었다.
이번에 도입될 i-SMR은 순수 국내 기술로 설계되는 혁신적 원자로다. 기본 단위인 모듈 1기당 170MWe의 전기출력을 내며, 통상 4기의 모듈을 하나의 표준 플랫폼으로 결합해 총 680MWe 규모의 발전소를 구성하게 된다.
현재 글로벌 SMR 시장은 기술 패권을 선점하기 위한 거대한 전쟁터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원전 강국을 중심으로 80여 종의 노형이 개발 중이거나 실증 단계에 접어들었다. 기술 방식 역시 전통적인 가압경수로(PWR)뿐만 아니라 냉각재로 물 대신 액체 나트륨을 쓰는 소듐냉각고속로(SFR), 헬륨 가스를 이용하는 초고온가스로(HTGR), 그리고 액체 용융염에 핵연료를 섞어 운전하는 용융염원자로(MSR) 등 4세대 기술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미국의 뉴스케일파워가 경수로형 SMR로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설계인증을 받으며 앞서가는 가운데, 테라파워를 비롯한 글로벌 혁신 기업들이 차세대 SMR 상용화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고 있어 바야흐로 ‘원전의 초소형·다각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케 한다.
SMR이 기존 대형 원전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무기는 압도적인 ‘안전성’이다. 기장에 들어설 i-SMR은 원자로, 증기발생기, 가압기, 냉각재 펌프 등 핵심 기기들을 하나의 거대한 압력용기 안에 모두 집어넣은 일체형 구조를 채택했다. 대형 원전 사고의 주요 원인이었던 원자로 연결 배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배관 파단으로 인한 냉각재 유출 사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여기에 자연법칙을 활용한 ‘피동형 안전 시스템’이 화룡점정을 찍는다. 만에 하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외부 전력 공급이 완전히 차단되는 극한의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사람의 개입이나 비상 펌프의 작동 없이 중력과 자연 대류 현상만으로 원자로 냉각이 가능하다. 이처럼 외부 지원 없이도 스스로 안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고유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대형 원전 대비 사고 발생 확률을 1000분의1 이하로 낮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초기 투자 비용과 금융 리스크가 낮다는 점도 독보적인 강점이다. 대형 원전은 현장 타설 방식으로 지어지기 때문에, 수조 원의 건설비 투입이 필요해 자금 조달이 큰 부담이었다. 반면 SMR은 핵심 부품을 공장에서 모듈 형태로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만 하면 된다. 건설 기간이 대형 원전 대비 획기적으로 짧아 이자 비용이 절감된다. 게다가 수요에 맞춰 순차적인 증설이 가능해 자금 집행의 유연성도 극대화된다. 즉, 투자하는 도중에 자금 회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은 자본으로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어 거대한 자본력이 없는 중소 국가나 민간 기업도 원전 건설에 나설 수 있다.
이제 첫발을 내디딘 기장 i-SMR이 성공적인 미래 에너지 플랫폼으로 도약하려면 주민과의 지속적인 소통과 엄격한 안전성 검증이라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 이번 유치는 주민들의 성숙한 수용성과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정부와 원자력계는 2035년 준공과 상업 운전 전 과정에서 안전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지역 상생을 최우선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사회적 신뢰라는 토양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정은 과학과 지역사회가 완벽히 상생한 세계적 모범 사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