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기장 고읍성(토성)의 맨발 걷기 길을 쓸며 빗자루 끝에 걸리는 흙모래의 무게를 느낀다. 시민의 무수한 발걸음이 다져놓은 이 단단한 길 위에서, 문득 최근 새롭게 출범한 민선 9기 새 부산시장의 여정을 떠올렸다. 새로운 시정이 걸어갈 길 또한 이처럼 시민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여정이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취임 첫 주를 맞이할 새 시장에게 수많은 당부와 제언이 쏟아지겠지만, 필자는 다소 역설적으로 새 시장이 마주해야 할 ‘두 번째 책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경제학 원론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생산 주체인 기업의 제1 행동준칙은 명확하다. 바로 한계수입과 한계비용이 일치하는 지점(MR=MC)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기업 대표가 아무리 훌륭한 사회공헌과 자선사업을 펼치더라도, 이윤을 창출하지 못해 문을 닫는다면 그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뿐이다. 민선 지자체장 역시 마찬가지다. 시정의 ‘첫 번째 책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당장 시민들이 겪고 있는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고를 해결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제조업과 건설업의 불황,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등으로 얼어붙은 부산의 민생을 돌보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시정의 생존 조건이다.
그러나 기업이 당장의 이윤에만 매몰되어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R&D)과 인재 투자에 소홀하다면 성장은 멈추고 만다. 시정도 일맥상통한다. 민선 시장이 당장의 민생안정과 눈앞의 표심을 달래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재임 기간 단기적인 인기는 누릴지언정 후세와 역사의 칭송을 받기는 어렵다. 당장의 결실에만 급급해 도시의 미래 지형을 바꿀 근본적인 투자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필자가 ‘두 번째 책무’를 강조하는 반전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부산은 미래 비전의 측면에서는 북극항로 개척, 동북아 해양수도, 세계 2위 환적항, 외국인 관광객 500만 시대라는 부푼 꿈이 가시화되고 있다. 하지만 청년 인구 유출 심화와 지역 경기 침체라는 현실은 여전히 냉랭한 아궁이와 같다. 구들목을 데울 장작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아궁이 불을 지필 불쏘시개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범용인공지능(AGI)이 촉발할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기 속에서, 필자는 그 결정적 불쏘시개가 당장 시장 직할의 ‘AI 통합 관제 센터’ 설치라고 확신한다.
최근 언론을 통해 새 부산시장이 AI의 중요성을 인식해 ‘AI 미래혁신국’을 신설하기로 개편안을 마련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조직 신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작동시키는가에 대한 디테일에 있다. 새로 구축될 관제 센터의 핵심 임무는 단순히 기술을 도입하는 차원을 넘어, 부산시 지능의 흐름을 조율하고 지역 산업의 ‘버티컬 데이터셋(Vertical Dataset)’이 안전하게 흐르도록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데이터 주권을 지켜내는 핵심 앵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두루뭉술한 청년 인재 정책이나 아날로그식 토목 인프라 확충만으로는 더는 인구 소멸 위기를 막을 수 없다. 부산이 가진 해양 물류 관광 등의 고유한 데이터 자산을 지능화해 지역 산업에 기술적 사다리를 놓아줄 때, 비로소 청년들이 머무는 혁신 생태계가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새 시장이 임기 초단기에 단행해야 할 확실한 불쏘시개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인 두 번째 책무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고 했다. 시민에게 안정된 일자리와 삶의 터전이라는 항산을 제공하는 것이 첫 번째 책무라면, 미래에 대한 확신과 비전을 심어주어 부산을 지키고 사랑하게 만드는 항심을 일구는 것은 두 번째 책무다.
새 부산시장이 당장의 민생안정이라는 첫 번째 책무를 단단히 디딤돌 삼아 도시의 체질을 바꿀 두 번째 책무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 주기를 기대한다. 화려한 취임사 너머 후세가 기억할 진정한 시정의 가치는 바로 그 불쏘시개를 지피는 디테일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