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계고 학생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처우는 몇 십년 전에도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제 세대에게는 와닿는 이야기지만, 요즘 청년들에게는 다소 오래된 아젠다가 아닐까 걱정이 됐습니다.”
6월에 진행된 영화 <3학년 2학기> 특별 상영회 자리에서 한 관객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진행자인 나는 영화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님께 마이크를 넘겼다. 그는 우리나라 청소년 5명 중 1명은 직업계고에 다닌다며 말을 시작했다. 적은 수가 아님에도 선거철마다 소환되는 ‘청년’이나 ‘이십대’는 여전히 그들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영화에서라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추가로 ‘오래된 아젠다’가 ‘해결되지 못한 아젠다’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정리했다. 하지만 ‘요즘 청년’이라는 호명에서도 소외되는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공장에서 어른이 돼 가는 영화 속 창우와 우재일지도 몰랐고, 어쩌면 스무살의 나일지도 몰랐다.
나는 직업계고에서 전자·기계를 전공했다. 진학 대신 취업을 택했고, 중소기업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이십대의 절반을 공장에서 보내면서도 ‘노동’ ‘안전’ ‘직업계고’ 등이 내 삶의 핵심 아젠다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건 지금 속해 있는 환경일 뿐, 내가 다루거나 논의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나는 아주 개인적인 삶에 골몰하기 바빴다. 어떻게 돈을 모을지, 연애는 어떻게 할지, 주말에는 어디에서 놀지 생각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고민이었다. 삶은 온갖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로 가득한 바구니 같았다. 나는 담겨 있는 것 중 무엇 하나 깨트리지 않도록 뒤뚱거리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바구니가 처참하게 엎어진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주워담을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고 깨지는 삶이 멀리 있지 않았다.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김군이 그랬고, 2017년 제주 생수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이민호가 그랬고,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김용군이 그랬다. 2021년 여수 요트 선착장에서 혼자 잠수 작업을 하던 홍정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노동’ ‘안전’ ‘직업계고’ 등의 아젠다가 멋드러진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전문가들의 강의, 주요 정당들의 정책간담회, 의견수렴을 위한 토론회가 이어졌다. 하지만 누군가 죽거나 다쳐야만 시작되는 논의는 매번 ‘누군가 죽지 않을 정도’에서 멈췄다. 교육과 노동, 제도와 정책의 마지노선은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삶이 멀어질수록 논의의 방향은 모호해진다. ‘오래된 아젠다’가 ‘해결되지 못한 아젠다’로 남는 이유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던 일상을, 자잘하고 사소한 고민을 들여다 보지 않고 해결책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전문가와 더불어, 비극적 스펙터클이 아닌 평범한 삶을 마주할 관객이 더 많이 필요하다.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던 <3학년 2학기> 특별 상영회는 그런 관객을 초대하는 자리였다. 곧 다가올 3학년 2학기에 맞춰, 각자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는 모두를 응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꿰맨 첫 단추였다. 영화의 서사는 오래 묵은 아젠다를 새롭게 펼쳐낼 구체적인 밑그림이 됐다.
놀라운 점은, 이 자리를 함께 기획하고 만든 이들이 직업계고와 현장 노동 문제에 공감하고 논의하고자 자발적으로 모인 ‘요즘 청년’들이라는 사실이다. 공고를 졸업하고 직업교육을 공부하는 서원석 연구자, 마지막 임기를 타인을 응원하는 데 쏟고자 하는 정예지 전 부평구의회 의원, 진심을 담아 영화 속 ‘우재’를 연기했던 양지훈 배우, 현장에서 함께하지 못했지만 함께할 의사를 밝혀준 수많은 청년들이 지금껏 들리지 않았던 ‘5명 중 1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오래된 아젠다’가 걱정이신 분들에게 기쁘게 대답하고 싶다. 청년들은 그곳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낸다고. 소외된 이들의 얼굴까지 기꺼이 마주하고 있다고. 서로의 관객이자 동료가 되고 있다고. 지키고 싶은 일상을 꼭 끌어안고 걷던, 스무살 나에게도 기쁘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