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최종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0-1로 패배한 한국 축구대표팀 경기에 지인이 쏟아낸 울분은 이러했다. “마치 이기고 있는 팀이 경기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현지 적응의 문제든, 그날의 컨디션 문제였든, 사령탑의 전술 부재이든, 실제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경기를 지켜 보는 동안 ‘지금 저들이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국내 정치로 눈을 돌려보면 거대 여야도 자신들이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 같다. 6·3 지방선거는 여야 모두에게 뼈아픈 결과를 남겼다. 그럼에도 지금 여당과 야당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민심을 확실히 가져왔다고 여기는 것인지, 다음 선거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으니 민심은 등한시하고 권력투쟁에 집중하는 것은 아닌지, 한심하다. 여당은 전당대회인지 분당대회인지 헷갈릴 정도로 계파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수정당으로서 쇄신이 절실한 야당은 당권파의 권력집착이 갈수록 가관이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한 ‘거여’ 더불어민주당은 오만의 늪에 빠졌다. 자당이 배출한 대통령에, 지난 총선에서 254석 지역구 중 164석을 확보한 민주당은 무엇을 하든 거침없다. 굳이 야당과 협상과 타협을 할 의지도 없다. 민주당에 반대하는 야당에는 무조건 내란정당이라며 몰아세운다. 의석에서 밀리는 ‘외부의 적’ 국민의힘이 전투력이 없으니 마음 놓고 당내 노선투쟁, 권력투쟁에 몰입한다.
정치성향은 달라도 중도확장 가능성, ‘뉴이재명’을 보고 이재명 대통령을 지지한 국민도 있는데, 직전까지 여당 대표를 맡았던 정청래 전 대표는 강성 지지층을 앞세워 매번 대통령과 엇박자를 냈다. 이재명 정권에 대한 기대감이 꺾이는 데에 여당 대표가 한몫 한 셈이다.
이른바 ‘ABC론’으로 촉발된 진보진영 내 계파 갈등은 8·17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멸칭으로 상대를 비하하며 내부총질을 한다. 이 같은 여당 내 계파경쟁에 국민들의 피로감만 커진다. 정부여당이 고물가·관세 협상 등 민생문제 해결에 앞장서기를 기대하는 일반 국민에게 여당의 권력다툼은 배 부르고, 너무 한가한 이야기다. 민심이 여당에서 떠날 수밖에 없다.
민주당과 이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잘 한 것 없는’ 국민의힘에 지지율 상승이라는 어부지리를 안겨줬다. 선거 이후 당 지지율까지 반등했으니 국민의힘 장동혁 지도부는 민심이 자당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진 듯하다.
12·3 계엄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의 그림자를 지우지 않고, 말로는 절윤(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했다고 하면서, 아직까지도 ‘윤 어게인’에 기대고 있는 정당이 국민의힘이다. “우리 당에 더 이상 윤 어게인은 없다. 친윤도 없다”며 아무리 방패막을 쳐도 국민이 보기에 국민의힘은 변하지 않았다.
그 책임은 오롯이 장동혁 대표에게 있다. 장 대표가 지난 24일 기자회견에서 당심을 앞세우며 사퇴를 거부하고, 당권파들이 선거에서 장대표가 선전했다고 평가하며 장동혁 지도부 체제를 유지하려는 행동 자체가 오히려 국민의 비호감을 유발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국민의힘은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원점으로 돌아가 재창당 수준의 쇄신을 했어야 하는 정당이다. 장동혁 지도부로서는 운 좋게도, 민주당의 지지율 하락에 따른 반사이익을 보며 지금까지 당권파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장 대표는 이에 자신감까지 얻은 듯, 해당행위 징계를 앞세우며 장 대표의 사퇴를 요구한 진영에 칼을 겨눴다. 그는 지난 26일에는 당사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며 당심에 따라 징계하겠다고 예고했는데, 이 경우 장 대표 사퇴를 요구하는 진영과의 정면 충돌도 불가피하다. 공공연하게 지리멸렬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국민의힘이 내홍만 커지게 되면 당의 비호감도 역시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여야가 민생은 뒷전이고 권력투쟁에만 몰두한다면 민심도 떠날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 기관의 정기적인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지지하는 정당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 진보 지지층은 현재 민주당 행태가 마음에 안 들어도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할 것이고, 보수 지지층은 마찬가지로 국민의힘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야의 권력투쟁에 신물이 난 민심이 언젠가는 민심이 ‘지지하는 정당 없음’에 몰표를 주는 날도 상상해본다. 그런데, 선거가 코앞이 아니라면 민심의 차가운 여론 쯤이야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것이 우리 정치의 씁쓸한 현실이다. 정치인을 정신 차리게 하는 가장 큰 회초리는 역시 ‘소중한 한표’가 되겠다.
김태경 서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