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에너지 수송의 대동맥으로 불리는 호르무즈 해협이 지난 2월 말 봉쇄되면서 우리 선사가 운용하는 선박들이 해협 안쪽에 발이 묶였다. 6월 미국과 이란이 종전에 합의한 뒤에도 선박들은 통항 절차를 거치며 순차적으로 빠져나오고 있을 뿐, 전쟁이 멈췄다고 해서 바닷길이 곧바로 정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도 항로가 닫히는 순간 움직이지 못하는 거대한 창고로 전락하고, 촘촘하게 짜인 공급망마저 멈춰 설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됐다.
호르무즈 사태는 항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고, 북극항로 같은 새로운 항로 개척의 당위성을 상기시켰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 상황에서도 선박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면 어떤 산업 기반을 갖춰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남겼다. 그동안 조선산업의 경쟁력은 선주가 요구하는 선박을 적은 비용으로 적기에 제공하는 데 맞춰져 있었고 이러한 경제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또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친환경 문제는 앞으로도 중요한 선박 성능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효율성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호르무즈 사태는 보여준다. 장기간 항로통제와 통신장애, 위성항법 교란, 화재와 침수 등 복합적 위험 속에서도 선박이 핵심 기능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과 사고나 공격을 겪은 뒤에도 운항 기능을 신속히 되살리는 회복력이 새로운 경쟁력으로 대두되고 스마트 선박, 자율운항선박의 핵심 기능들이 이러한 회복력을 이끄는 중요한 역량으로 자리 잡고 있다.
회복력은 개별 선박의 성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LNG운반선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국가 공급망을 온전히 유지하려면 중형 유조선과 소형 컨테이너선, 다목적선 등과 함께 예인선과 방제선 같은 특수선까지 두루 확보돼 있어야 한다. 이 선박들은 수익성은 낮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에너지와 원자재를 실어 나르고 국민의 생활을 지켜내는 전략자산이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회복력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중소조선과 기자재 산업이 굳건한 생태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선박의 유지보수에 필요한 관련 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선박은 인도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세계의 바다를 누빈다. 선박의 운항 기간 발생할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긴급 수리, 항해·통신장비의 보강과 예비품 공급이 지체 없이 이뤄지려면 이를 뒷받침할 국내외 서비스 거점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이제 조선산업은 선박을 건조하여 인도하는 산업에서 선박의 일생을 책임지는 전주기 서비스 산업으로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 5월 발표한 ‘K-조선 미래비전’에서 자원·에너지 관련 선박의 공공부문 우선 국내 발주 방안을 구체화하고, 향후 5년간 최대 5250억 원을 투입해 LNG운반선과 암모니아선, 수소운반선 등 7개 선종의 핵심기술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산업을 미래의 지속가능한 주력산업으로 중점 관리하면서 필수 선박의 국내 생산 역량을 산업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방향이다. 다만 정책의 성패는 투자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공공 발주가 일회성 수요 진작에 그치지 않고 국내 조선산업의 안정적 생산 기반과 기자재 국산화, MRO 역량 강화로 이어지도록 조선소와 해운사, 항만과 정비업체를 하나의 국가 공급망으로 탄탄하게 엮어 내는 장기 전략이 뒷받침돼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해양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군함 건조를 요청하고 있다. 최첨단 장비를 갖춘 미 항공모함이 세탁실 화재와 화장실 배관 문제로 작전 수행에 차질을 빚어 수리에 들어갔다. 조선산업의 회복력은 선박의 화려한 외형에 있지 않다. 위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기반 시설 확보와 충분한 물자를 적기에 공급할 운송 능력에 달려 있다.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미국의 조선산업이 회복력을 상실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보며 우리 조선산업의 미래를 가늠하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