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상상해 보자. 당신의 어깨와 나의 등이 만났을 때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는가.
‘한쪽 어깨와 등을 맞댄 두 사람의 대립은 이내 무너진다. 넘어질 듯 기울어진 몸은 잠시 버티는가 싶더니 바닥을 구르며 다시 다른 접촉으로 이어진다. 한 몸의 낙하는 또 다른 몸의 도약이 된다’. 지난 5월 부산국제즉흥춤축제에서 본 접촉즉흥(Contact Improvisation)의 한 장면이다. 현대 즉흥춤의 한 양식인 접촉즉흥은 1970년대 미국 포스트모던댄스의 흐름 속에서 현대무용가 스티브 팩스톤에 의해 시작됐다. 이는 새로운 춤 테크닉의 발명이라기보단 몸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의 제시에 가까웠다. 당시 서양 예술춤의 두 축을 이루던 발레와 현대무용이 안무 형식이나 사상의 표현을 강조했다면 접촉즉흥은 걷기 구르기 기대기 넘어지기 등과 같은 일상적 움직임 속에서 춤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이 춤은 의식적인 구성에 중점을 두지 않고 두 사람 이상의 몸과 몸이 접촉하며 만들어가는 움직임의 ‘현상’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오늘날 춤 커뮤니티에서 행해지는 즉흥춤은 특정 춤 장르에 집중하기보단 즉흥적 움직임 그 자체의 감각적 가치, 나아가 일상 속 사회문화적 의미를 찾는 데 몰두한다. 즉흥 중에서도 특히 접촉즉흥이 흥미로운 이유는 접촉을 단순한 동작이나 멋진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용인류학자 신시아 노박은 현대 접촉즉흥의 문화적 의미를 찾으면서 이와 대조적인 고전 발레의 접촉에도 주목한다. 파드되(2인무)에서 발레리나는 남성 파트너의 손을 잡고 회전을 수행하고, 남성무용수는 여성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조각과도 같은 아름다운 순간을 완성한다. 이러한 접촉은 힘의 위계와 젠더 역할의 명확한 구현이 핵심이다.
반면 접촉즉흥에서 접촉은 즉흥적인 움직임을 생성하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평등과 민주적인 참여를 독려한다. 몸은 상대의 체중을 느끼고, 압력을 읽고, 중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균형에 반응한다. 이 과정에서 무용수에게 부여된 성적 역할은 존재하지 않으며 동등한 인간으로서 타자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누가 지지하고 누가 의지하는지, 누가 중심이고 주변인지는 중요치 않다. 접촉은 나와 타자의 몸 경계를 흐리면서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하며 춤을 이어간다.
이러한 흐름을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미’에 도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이 접촉은 과연 무엇이기에 춤이 되는가. 흔히 접촉을 피부가 맞닿는 물리적 행위로 이해하지만 접촉즉흥에서 경험되는 접촉은 그 이상을 함축한다. 중요한 것은 접촉이 주는 감각과 반응, 그리고 관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라틴어로 ‘몸’을 뜻하는 ‘코르푸스(Corpus)’에서 몸을 독립적으로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다른 몸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로 설명한다. 여기서 몸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건네지고, 노출되며, 접촉하는 존재이다. 어떤 의미를 담아 전달하는 기호가 되기를 거부하고 외부로 자신을 드러내는 실존의 방식을 따른다. 그러하기에 움직이는 행위를 ‘몸-쓰기’라 여기며, 이는 자신 안으로 새겨 넣는 ‘기입’이 아니라 바깥으로 써내는 행위, 곧 ‘기탈’이라 말한다.
현대무용가 마틸드 모니에와 나눈 낭시의 서신에도 이러한 기탈의 방향성이 깔려있다. 낭시는 춤을 ‘바깥(dehors)으로 향한 몸의 운동’이라 정의하고, 이에 마틸드는 ‘투사된 몸’ 그 자체에 흥미를 보인다. 여기서 두 사람이 공감한 ‘바깥’은 타자와 세계,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도래하는 자리로 읽힌다. 타자를 향해 열리는 과정에서 몸은 끊임없이 자신을 벗어나 다른 몸들과의 관계 속을 향하는 것이다. 접촉즉흥은 표현주의 예술과는 달리 특정한 의미를 해석하거나 상징을 읽어내는 작업과는 거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개별의 몸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서로에게 반응하는가에 있다. 접촉즉흥이 보여주는 접촉은 결속이나 소유보다는 경계와 차이를 인식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몸들이 차이를 유지한 채 서로에게 자신을 열고 ‘함께 존재하는 법(être-avec)’을 수행한다.
이러한 몸의 경험은 오늘날 더욱 의미심장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접촉의 부재를 경험하게 했고, 몸과 몸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했다. 또한 AI 기술과 디지털 환경의 일상화 속에서 인간은 점차 데이터로 환원되지만, 몸의 경험만큼은 여전히 대체될 수 없다. 접촉즉흥은 끊임없는 ‘몸-쓰기’를 통해 감각을 일깨우고,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존재를 인식하게 하며, 다시 공동체적 사유로 되돌아가게 한다. 오늘날 접촉즉흥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 움직이며 존재하는 경험을 몸에 되돌려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