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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신문DB |
지난주 치러진 선거를 목도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견해를 제시한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문득 떠오른다. 몰락한 구체제의 일원이었던 이 고명한 지식인은 18세기 말의 프랑스혁명 이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등장한 민주주의를 체념과 기대의 교차 속에서 주시했었다. 프랑수아 기조나 뱅자맹 콩스탕과 같은 당대의 자유주의자들이 정부 형태로만 인식했던 민주주의를 귀족주의자인 토크빌은 역사적 변화의 과정이자 새로운 성격의 권력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른바 ‘민주주의 혁명’이 개인들 간의 평등을 진작시킴으로써 자유의 증진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을 평준화하고 익명적 권력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그들의 권한을 오히려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무한한 자유의 귀결은 새로운 노예체제였다는 것이다.
1권은 1835년, 2권은 1840년에 출간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창출해 낸 동질화된 사회 속에서 거대한 권위가 성립되는 역설적 현상을 ‘다수의 폭정’이라고 표현했다. ‘인민(le peuple)’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권력’은 비가시적이며 아무런 중심도 없다. ‘이 권력은 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비인격적이다’. 1856년에 초판이 나온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토크빌은 앞의 저작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원동력으로 간주한 ‘조건들의 평등’이라는 이념의 실제적 효과를 탐색하면서 인민주권론에 기초한 민주정이 전제정으로 전복될 위험성을 엄중히 지적한다. 민주주의 혁명은 정치적 정당성과 진리의 토대들을 파괴하여 개인들을 사회적 관계로부터, 심지어 조상들과도 떼어놓음으로써 ‘진정한 고독 속에 가둔다’. 이처럼 개인들이 원자화되는 와중에 민주주의는 단일한 중심으로서의 국가권력을 극대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견해는 평등의 요구에 내재한 정치적 가능성들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한계를 지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돌아볼 시사점을 제공한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늘 결과론적 해석들이 판을 친다. 마치 선거 결과가 선거전략상 잘하고 못한 것의 필연적 귀결인 마냥 각종 분석들이 펼쳐지지만, 이 예리한 분석가들에게 그럼 선거 전에는 왜 성심껏 그런 제안을 못 했었는지 묻고 싶다. 그런데 선거에 대한 이 모든 분석에 공통된 기본전제는 국민이 늘 응당한 심판을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정치평론가들은 마치 중세기 신학자들이 주어진 사태에서 신의 의중을 찾아내고자 부심했던 것처럼 선거 결과에서 국민의 명령을 밝혀내고자 애쓴다. 그렇지만 만약 선거전략이 옳았다면 정말로 결과도 좋았을까. 국민은 정녕 무오류의 화신일까. 국민이 실로 정의롭다면 설령 정치권의 선거전략에 다소 부족함이 있더라도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과연 국민은 자식의 생명까지 바치라며 믿음을 시험한 폭풍과 전쟁의 신 야훼에게 버금가는 존엄하고 가혹한 존재인가.
솔직히 말해 국민 다수는 정치 저관여층이다. 아예 정치적 사안에 관심이 없거나, 있더라도 대체로 부동산 등 협소한 이해관계에 민감하다. 불의에 저항하여 들불같이 일어나는 소위 ‘민초’도 국민 전체로 보면 사실상 다수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선거에 일정한 흐름이 있더라도 그 결과는 많은 경우 우연과 변덕에 좌우된다. 아무리 대세가 분명하더라도 쉬운 선거가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국민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현명한 선택을 해주셨다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신학적이다. 물론 정치인이라면 응당 자신이 국민의 명령에 제대로 부응했는지, 처신에 소홀함은 없었는지 늘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피선거권자가 아닌 마당에 선거전략을 따지는 것은 좀 우습다. 유권자는 유권자답게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피선거권자만큼이나 선거권자도 나름의 권리와 책임이 있다. 탄핵된 대통령들을 뽑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국민이었다.
여론의 전능함이라는 환상은 어느덧 시들해졌다.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과연 숫자로 정당함을 결정해도 좋은가.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선거 중심의 민주주의 체제를 이대로 존속시켜도 좋은가. 기껏 중대선거구나 결선투표제 도입 등으로 해결될 일인가. 물론 독재자의 독단이나 소수의 담합보다는 다수의 열린 의견이 분명히 낫다. 그렇지만 선거공학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위축시키고 있다면, 시민발안제나 소수집단 거부권 도입 등 기존 선거 제도를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상상해 봄 직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