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바꾼 거대한 기술적 진보는 종종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첫 걸음을 뗐다. 19세기 말 구글리엘모 마르코니가 발명한 무선통신 기술이 대표적이다. 당시 육지에서는 유선 전신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박에서 무선통신은 ‘고립된 섬’에서 벗어나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결국 모르스부호를 이용한 무선통신은 선박의 안전항해를 위해 해상에서 가장 먼저 상용화됐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초연결 사회의 근간이 됐다.
오늘날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또 다른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다. 국제해사기구(IMO)가 제시한 2050년 탄소중립 목표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필자는 과거 무선통신 기술이 그러했듯,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탄소감축 및 무탄소 기술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 또한 바다와 선박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선박은 그 자체로 거대한 에너지 소비처이자 복합적인 시스템의 집약체이기 때문이다. 해운업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를 차지하고 있어, 선박 한 척의 연료를 탄소중립 연료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탄소감축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해상 환경은 가혹하다. 높은 습도, 염분, 격렬한 파도와 진동 등에 견뎌야 하고 최근 기술개발이 한창인 북극항로 운항선박은 극한의 조건을 견뎌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극한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기술은 육지의 그 어떤 환경에서도 완벽한 신뢰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바다와 선박을 탄소중립 기술의 ‘테스트베드’이자 상용화의 시작점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 글로벌 조선해양 시장은 암모니아 수소 메탄올 등 차세대 친환경 연료로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규제의 대상은 선박이지만, 그 규제를 현실화하는 핵심기술이 적용되는 장비는 선박에 탑재되는 수많은 선박기자재라는 사실이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고효율 엔진, 탄소포집 및 저장장치(OCCS), 바람을 선박이 추진하는데 필요한 동력으로 조력해 주는 로터세일(Rotor Sail) 등 첨단 기자재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탄소중립 선박은 선주의 설계도상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탄소감축 기술의 조기 상용화를 위해서는 기자재 산업에 대한 집중적인 R&D 투자와 정책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특히 최근 부상하는 미 함정 MRO 시장 대응이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상황에서 우리 기자재 산업의 기술 고도화는 국가적 경쟁력과 직결된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이 세계 시장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트랙 레코드(Track Record), 즉 실제 운항 실적이 필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바다 위에서 검증되지 않으면 보수적인 해운 시장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KOMERI)이 다목적 해상실증 선박인 ‘KOMERI 1호’를 진수하고, 암모니아 연료공급 실증센터 등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구실 안에서의 데이터가 아니라, 실제 바다 위에서 기자재가 어떻게 반응하고 성능을 발휘하는지를 입증해 내야만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의 ‘슈퍼 을(乙)’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모르스 부호가 바다의 침묵을 깨고 인류에게 무선통신의 시대를 열어주었듯, 이제는 탄소중립 기술이 바다에서부터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야 한다. 탄소감축 기술의 상용화 속도가 곧 국가 해양 경쟁력의 척도가 될 것이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기점으로 정책과 현장, 기술이 하나로 응집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정부와 연구기관, 그리고 산업계가 ‘원팀’이 되어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도전 과제를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 2026년 5월, 이 화창한 봄날의 다짐이 훗날 대한민국이 글로벌 해양 기술 패권을 주도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배정철 한국조선해양기자재 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