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열 명 남짓한 청년 작가들을 모시고 출간기념회를 진행했다. 함께 만든 책들을 앞에 두고 출간 과정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난 두 달간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한 책 쓰기 프로그램은, 청년이 직접 쓴 원고를 엮어 책을 출간하는 커리큘럼으로 진행됐다. 총 네 번의 강의로 구성되었는데, 눈썰미가 워낙 없다 보니 강의 막바지에도 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의 이름을 완전히 외우지 못했다. 개개인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몇몇 특성만으로 이들을 간신히 구분하는 것만이 정해진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강의가 끝난 이후 출간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며, 수강생들이 마감 기한에 맞춰 원고를 하나둘 보내왔다. 강의 때는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른다고 바빴던 까닭에 충분히 알지 못했는데, 원고를 수급하는 과정에서 수강생 개개인의 내밀한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원고를 세세하게 읽다 보니 처음에는 이름도 구분하기 어려웠던 수강생들이 좀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더 나아가 이들은 그저 미취업 청년 중 한 명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두세 편 남짓한 짧은 원고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한 사람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거리를 던져준 특별한 경험이었다.
국가데이터처에서 발표한 2026년 3월 고용동향을 보면 15세 이상 고용률은 62.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청년층 고용률은 43.6%로 23개월 연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취업이 쉽지 않은 현실에서, 미취업 상태를 넘어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 ‘쉬었음 청년’ 역시 40만 명을 기준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단순히 청년 구인난이 심각하다며 넘어갈 수 있지만,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인력난이 심화되고 있다는 통계를 함께 놓고 보는 순간 문제는 복잡해졌다. 이를 두고 산업구조의 변화, 낮은 경제 성장률, 노동시장의 위축과 유연화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웠지만, 청년 개개인을 향해 특정한 잣대를 내밀며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책 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수강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나 역시 ‘미취업 청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네 번의 강의를 마칠 때까지도 편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원고를 통해 개개인의 특별한 사연과 마주했을 때, 질문은 점차 바뀌었다. 각자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정상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특정한 기준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자칫 이들을 정상성에서 벗어난 결함 있는 존재로 그려내는 것은 아닐까?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를 알게 된 순간, 편견에 사로잡혀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은, 곧 불가역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 존재에 관한 빈약한 이해, 불완전한 평가와 판단은 얕은 접촉의 결과이다. 숫자를 보면서 청년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숫자 너머에 있는 현실의 청년 한 명을 알아가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취업 상태, 구직 활동 여부는 ‘그렇다’와 ‘아니다’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으로 대답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청년에게는 곧장 ‘미취업 청년’ 혹은 ‘쉬었음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다만 그것이 곧 한 개인이 대답할 수 있는 전부라고 보긴 어렵다.
우리는 이들의 고민과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공감과 이해 없는 분석과 평가는 결국 공허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분류하고 평가할수록, 청년들은 더욱 위축되며 입을 굳게 닫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청년들을 향해 취업 여부만을 물었다면, 이제는 질문을 바꿔 이들에게 어떠한 이야기가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그들이 입을 열며 생생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숫자로는 측정할 수 없는, 접촉의 깊이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