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뒤편의 비극을 껴안는 역원근법의 미학

전쟁과 제노사이드, 경제적 결핍의 시대

소외된 그늘·슬픔에 손 내밀어야 할 예술

이상헌 춤 비평가

  • 이상헌 춤 비평가
  •  |   입력 : 2026-04-15 18:43:38
  •  |   본지 19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묘사한 블랙홀 ‘가르강튀아’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킵 손의 중력 렌즈 효과 방정식을 실제 렌더링에 투사한 과학적 실재의 투영이다. 이 거대 질량의 실체는 단순히 빛을 삼키는 어둠이 아니다.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은 시공간을 휘게 만들어, 블랙홀 뒤편의 광륜을 관찰자의 정면으로 끌어올린다. 뒤쪽이 앞쪽으로 굴절되어 나타나는 이 경이로운 현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선 원근법적 세계관의 직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시각이 시공간의 압도적인 실재 앞에서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를 보게 한다. 이 현상을 보며 러시아의 성상화와 조선의 책거리 그림에 적용된 역원근법을 떠올린다. 멀리 있는 것을 작게 그리거나 지우는 대신 오히려 확장해 보이지 않는 뒤편을 기어이 화면 안으로 끄집어내는 이 독특한 화법은, 기술적 미숙함이 아니라 존재의 총체성을 회복하려는 치밀한 예술적 의도이며 시공간의 익숙한 좌표를 지우고 존재의 결을 재구성해 보이지 않는 너머를 보는 방식이다. 이런 의도는 인류의 비극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질량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제노사이드, 그리고 삶을 짓누르는 경제적 결핍의 시기에 다시 선명해진다.

역원근법의 토대를 닦은 러시아 출신 종교철학자 파벨 플로렌스키는 삶 자체가 휘어진 빛이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내전, 스탈린 체제의 가공할 만한 탄압 속에서 성스러움과 예술, 그리고 과학을 지키려 한 러시아의 다빈치였다. 그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천착한 역원근법은 인간의 오만한 시선이 세상을 재단하는 선 원근법에 대한 신학적·철학적 저항이며, 대상의 실재를 온전히 담아내려는 영성적인 시도였다. 전쟁과 제노사이드는 인간을 거대한 중력처럼 짓누른다. 국가라는 거대 질량이 개인의 삶을 삼키고, 양민 학살이라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수많은 목숨을 지워버릴 때, 진실은 언제나 은폐된 뒤쪽에 머문다. 플로렌스키는 성상화의 역원근법을 통해 현상의 뒤편을 보라고 권한다. 소실점을 관찰자 내면으로 옮김으로써, 가려진 대상을 시야의 중심에 두는 것. 그것은 서로를 타자화하며 적대를 정당화하는 분절된 진영의 서사와 폭력이 지워버린 인간 존엄을 역설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그에게 예술은 비극의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기어이 현상의 이면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조선 후기의 책거리 그림에서도 유사한 인문학적 온기를 읽을 수 있다. 책거리는 서구적 투시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의도적으로 역원근법을 혼용했다. 책장의 윗면과 옆면이 동시에 보이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사물의 모습은 기하학적 오류가 아닌, 대상에 대한 지극한 애정의 발로다. 당시 조선은 극심한 기근과 경제적 위기, 신분제의 동요라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물질적 풍요가 거세된 시대, 예술가들은 역원근법을 통해 사물의 모든 면을 한꺼번에 포착하고자 했다. 이는 소유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앎’의 갈망이자, 삶의 결핍을 예술적 풍요로 치유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책거리 속 역원근법은 대상을 내 발밑에 두려는 권력의 시선이 아니라, 대상의 다면성을 복원해 숨겨진 뒤태까지 보듬으려는 다정하고 품격 있는 시선이다.

‘인터스텔라’의 블랙홀과 러시아의 성상화, 조선의 책거리는 시공간을 넘어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아의 영토 안에 머무는 익숙한 풍경만을 허용하는가, 아니면 소외된 뒤편의 슬픔까지도 환대하는 존재론적 포용을 실천하고 있는가’. 빛이 꺾여 뒤쪽을 보여주는 현상은 물리학적으로는 시공간의 왜곡이지만, 인문학적으로는 이해의 확장이다.

오늘날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포화와 제노사이드의 비극, 전 지구적 경제 위기라는 거대 중력의 영향에 휘말려 고통받고 있다.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가르강튀아의 빛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처절한 비극의 중력 속에서도 빛은 경로를 수정하며 끝내 존재를 증명해 낸다는 사실이다. 전쟁으로 지워진 이들의 뒷모습과 경제적 소외로 가려진 이들의 삶을 앞쪽으로 끌어올려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예술이 수행해야 할 역원근법적 임무다. 선 원근법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정렬시킨다면, 역원근법은 타자를 위해 중심을 옮기는 관계의 미학이다.

이제 직선의 오만을 거두고, 사랑과 환대의 중력으로, 굴절된 시각을 회복할 시간이다. 세상의 모든 뒤편은 사실, 소외의 그늘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줄 손길을 갈구하는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뒤편의 슬픔과 비극을 기어이 시야 안으로 초대하는 것은 구부러진 빛의 길 위에서 온전한 인간 존재를 마주하는 일일 것이다. 소실점 너머로 사라져 가던 것들을 향해 손 내미는 역원근법이라는, 시대를 건너온 미학적 유산은 전쟁과 증오의 중력에 빨려 들어가는 현대 문명을 향한 처절한 경고이자 마지막 구원의 손길일지도 모른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광안리보다 북항 먼저…부캉이가 바꾼 관광지도
  2. 2부산 금정구·경남 통영시, 정부 인구감소지역 추가(종합)
  3. 3청소년 흡연장 된 사하구청 제2청사 옥상…구, 침입 사실도 몰랐다
  4. 4전재수 “G20정상회의 유치 도전…북항 돔 아레나 조성 추진”
  5. 5보일러 배기통 막혀 세입자 참변…法 “집주인 9억 배상”
  6. 6[뭐라노] ‘북항 찍고’ 광안리·해운대…부캉이가 바꾼 관광지도
  7. 7신용점수 만점자도 이자 비상…마통 평균금리 5%대 ‘쑥’
  8. 8부산시 내년 생활임금 확정, 시간당 1만2729원…3.7%↑
  9. 9부산 트리플 환승 요충지, 43층 주거 랜드마크 ‘우뚝’
  10. 10SMR 인허가 심사기준 2032년께 마련? 골든타임 놓칠판
  1. 1박형준, 퇴임 후 첫 공개 행보… 총선엔 “아직 생각 없다”
  2. 2부산시의회, 교통공사·시설공단 대표 후보 ‘부적격’ 의견
  3. 3[속보] 진영승 합참의장 “MDL 지뢰 폭발 사건은 ‘도발’…北 정권 행위 강력 규탄”
  4. 4암살자(들)·北 지뢰 여야 충돌…JYP ‘K-팝 축제 특혜’ 반박(종합)
  5. 5외모·학력차별…민간도 공공도 불공정 채용
  6. 6백종헌 “부산대병원이 7년째 권역센터 빠진게 정상인가” 질타
  7. 7[2026 국감 브리핑] 자격유지검사 않는 고령운수자 1400명
  8. 8[속보] 김여정, 정부 대북 의료장비 지원 방침에 “지뢰 사고 조작 뒤 또다른 광대극…변종된 정치적 도발”
  9. 9박성훈, 부산 보훈의료 공백 해소 물꼬…보훈부 장관 “전면 조사해 대책 마련”
  10. 10'이종석 방미 거부' 부인했지만…한미 정보당국간 불협화음 여전
  1. 1신용점수 만점자도 이자 비상…마통 평균금리 5%대 ‘쑥’
  2. 2부산 트리플 환승 요충지, 43층 주거 랜드마크 ‘우뚝’
  3. 3SMR 인허가 심사기준 2032년께 마련? 골든타임 놓칠판
  4. 4부산 외국인 관광객 400만 시대…‘머무는 관광’으로 질적 도약 모색
  5. 5누리호 5차 발사…군집위성 5기 모두 교신 성공(종합)
  6. 6삼성전자 3분기 영업이익 107조…글로벌 빅테크 첫 기록(종합)
  7. 7홈플러스, 희망퇴직 돌입…MBK 경영권도 사라져
  8. 8부울경 산학 기술력으로 누리호 성공 쐈다
  9. 9근무시간에 사주 상담…HUG 직원 면직 처분
  10. 10삼성전자 분기 영업익 ‘100조 시대’ 임박
  1. 1광안리보다 북항 먼저…부캉이가 바꾼 관광지도
  2. 2부산 금정구·경남 통영시, 정부 인구감소지역 추가(종합)
  3. 3청소년 흡연장 된 사하구청 제2청사 옥상…구, 침입 사실도 몰랐다
  4. 4전재수 “G20정상회의 유치 도전…북항 돔 아레나 조성 추진”
  5. 5보일러 배기통 막혀 세입자 참변…法 “집주인 9억 배상”
  6. 6[뭐라노] ‘북항 찍고’ 광안리·해운대…부캉이가 바꾼 관광지도
  7. 7부산시 내년 생활임금 확정, 시간당 1만2729원…3.7%↑
  8. 8[뭐라노] 금정구가 인구감소지역이라고?
  9. 9금융기관 해킹 IP 상당수 ‘세탁용’
  10. 10부산시, 민선9기 공약 122개 실천계획 확정…총사업비 35조5250억 원
  1. 1하현승, 계약금 16억에 키움 입단
  2. 2SON A매치 최다골 대기록에도…뒤숭숭한 韓축구
  3. 3김도영 굳히기냐, 힐리어드·오스틴 뒤집기냐
  4. 4롯데, KIA에 4-12 패…8회 7실점 ‘와르르’
  5. 5롯데, 6위 탈환 사활…3위 싸움 변수로
  6. 6조코비치, 올 첫 우승 눈앞
  7. 7장애인AG 결단식…“金 21개 이상 목표”
  8. 8가을은 놓쳤지만…거인 ‘레·황(레이예스·황성빈)’ 도전은 계속된다
  9. 9“감독님이 먹으라고” 정수진, 내막 폭로…유도회 “선수관리·운영체계 점검” 사과
  10. 10레이예스 200안타 달성에도…롯데, 두산에 4안타 그치며 패배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원자력 청출어람, 스승을 가르치다
‘인공지능 정렬’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
국제칼럼 [전체보기]
누구도 법 앞에 국민보다 ‘더 평등’할 수 없다
배지의 실력행사
기고 [전체보기]
전문대학을 소개합니다
상어가 떠난 뒤, 북항에 남겨야 할 것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히말라야의 경고
도청도설 [전체보기]
유튜브 쇼츠 정치
통행료 면제 명암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B형 간염 ‘바이러스 수치’에 ‘급여’ 맞춰야
‘공동선(Common Good)’으로서 간병 복지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지독한 집념이 세운 로컬 자산, 대한도기
사설 [전체보기]
누리호의 도전, 역대 최다 15기 위성 싣고 우주로
국제기구 인증보다 주민 체감 효과 중요하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빚을 물려받는 사회
부자(富者)가 되고 싶다면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아트부산, 숫자 이후의 질문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행위별수가제와 인두제, 오해와 진실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 곡전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무(武)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