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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체험없는 과학교육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감성물리’ 저자

  •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감성물리’ 저자
  •  |   입력 : 2026-04-13 18:41:5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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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를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힘을 빼고 칼을 잡는 대신 몸통의 힘을 이용하라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초보인 나에겐 공허하고 막막한 설명이었다. 초단 승단 후에는 칼보다 발에 더 주목해야 하며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눈썰미가 가장 중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초보자였다면 그 역시 막연하게 느껴졌겠지만 수년 간의 수련 덕에 칼보다 발의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후부터 복싱 동작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복싱도 거리를 가늠해 상대를 압박한 후 짧은 순간 드러난 빈틈을 향해 발과 몸이 먼저 파고든다. 검도에서 힘을 빼고 칼을 쥐듯 복싱도 어깨와 팔의 힘을 뺀 채 질량이 더 큰 몸통의 운동량을 주먹에 싣는다. 인간의 팔과 칼이 길이만 다를 뿐 복싱과 검도에 동일한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10여 년 수련 후 고단자 심사를 준비하는 동안, 일흔을 넘긴 8단 고수는 칼 발 눈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두려움에 맞서 언제든 도약할 수 있는 마음이 몸과 칼을 움직이고 그 모든 준비가 칼을 쥐고 서 있는 자세로 드러난다고 했다. 바위처럼 내면이 견고할수록 칼을 쥔 손의 힘이 빠지면서 마음의 눈을 통해 상대의 빈틈을 먼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보 시절처럼 칼을 쥐고 서 있는 자세를 다시 연습하게 되었지만, 내 몸이 기억하는 수천 시간의 경험 덕분에 오래전 막연해 보였던 검의 원리들이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복싱 경기를 학습한 AI가 변해가는 모습도 비슷하다. AI는 힘과 운동의 물리법칙에 기반해 복싱을 이해하지 않는다. 운동을 배우는 초보자처럼 다양한 시행착오와 경험이 쌓여가면서 스스로 최적의 동작을 알게 된다. 최근 중국 연구진들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던 AI가 수십억 번의 학습을 마친 후 실제 복서와 유사한 동작으로 바뀌는 창발 현상을 발견했다.

처음 마주한 과학 법칙도 검도의 원리처럼 첫인상은 대체로 낯설다. 설령 어렴풋한 공감의 느낌이 들더라도 착각일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과학 지식은 일상적 경험이나 상식과 다른 기이한 내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여러 세대를 거쳐 논의된 고정관념과의 치열한 대립과 다양한 실험 경험이 숨겨져 있다. 과학사는 인류가 자연과 우주의 법칙을 결코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닫게 되었다는 천재의 영웅 서사를 더 좋아한다.

우리의 과학교육은 뉴턴이 실패한 수많은 계산과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고민, 그들에게 전수된 선대의 밤하늘 빅데이터를 살과 내장을 도려내듯 제거한 뒤 성공적 결과의 정형화된 뼈대만 보여주며 공감을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원리와 법칙의 뼈를 주고 살을 붙여나가는 연역적 방식의 교육은 이미 이해한 지식을 정돈하기에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초보자에게는 공허할 뿐이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는 개인의 과학 체험이 결여돼 있다. 중고등 과정에도 실험 과목이 있지만 입시의 관점에서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알려진 이론을 확인하는 대학의 식상한 실험 종목 역시 수십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획일적 경험을 강요하는 실험 수업을 많은 학생들은 호기심이 아닌 학점을 위해 수강하고 있다.

스포츠 과학의 분석과 이론만으로는 검도와 복싱을 배울 수 없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의 시행착오와 수많은 상대와 싸운 몸의 경험이 우선 필요하다. 학습 방식에 따라 최적의 해법을 찾아가는 AI의 경로가 달라지듯 과학을 이해하는 과정 역시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복서마다 독특한 스타일을 지니게 되고 과학적 개성과 창의성이 생겨난다. 언제든 집에서도 석학들의 온라인 강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시대. 자라나는 세대에게 진정 필요한 교육 공간은 강의자의 말을 받아적는 조용한 교실이 아니라 체험과 토론이 가득한 작업실이 아닐까? 융합과 혁신은 인위적으로 정돈된 곳보다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경험하는 창고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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