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께로 기억한다. 당시 정부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 의결을 추진했다. 계획안에는 방사성폐기물(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이나 영구처분시설을 짓기 전까지 원전 부지 내에 건식저장시설을 설치해 사용후핵연료를 잠시 보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두고 부산에서는 ‘고리원전이 영구 핵폐기장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중간·영구처분시설 부지를 찾는 것이 수십년간 풀지 못한 국가적 난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계획안은 2021년 12월 말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의결됐다. 1년 뒤인 2022년 12월에는 ‘고리원전 내 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건식저장시설) 설치’와 관련한 공사 발주가 시작됐다. 2023년 2월에는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자사 이사회에서 ‘고리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 건설 기본계획안’을 의결했다. 해당 시설 설치를 위한 법적 근거가 모두 마련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편에서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특별법안(고준위 특별법)’ 제정 작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바로 정치권이다. 이 법은 한 마디로 방사성폐기물(방폐물) 중간·영구처분시설 확보의 근거가 되는 법이다. 특별법에는 중간저장시설을 2050년까지, 영구처분시설을 2060년까지 각각 짓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법은 2025년 2월 국회 본회의를, 같은 해 3월 국무회의를 각각 통과했다. 원전 부지에 건식저장시설을 짓기 위한 정부 절차, 중간·영구처분시설 부지를 찾기 위한 정치권의 움직임이 수년에 걸쳐 병행돼 온 셈이다.
고준위 특별법 시행 1년이 흐른 현재 중간·영구처분시설을 짓기 위한 절차에는 속도가 붙었다. 국무총리 소속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고준위위원회)’는 방폐물 처분시설을 설치하기에 부적합한 지역(화산·단층 지역 등)을 올해 말까지 우선 배제하고 입지 여건이 양호한 지역을 사전 조사해 그 결과를 국민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처분시설 적합 지역이 사실상 연내 윤곽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정부의 이런 속도전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현재 정부는 불과 6년 뒤인 2032년 고리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보관 수조가 꽉 찰 것(100%·산업통상부 추계 기준)으로 본다. 이보다 앞선 2030년에는 전남 영광 한빛원전이, 2031년에는 경북 울진 한울원전이 각각 포화 상태에 이를 전망이다. 중간·영구처분시설이 마련되지 않으면 원전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순히 관련 법을 제정했다고 방폐장 부지를 찾는 난해한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될까. 과거 수십년간 사례를 보면 ‘그렇다’고 쉽게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산업부의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건설 추진 사례’ 자료를 보면 역대 정부는 ▷1986~1989년(경북 울진·영덕·영일) ▷1990~1991년(충남 안면도) ▷1991~1993년(부지 공모를 통한 후보지 도출) ▷1994~1995년(서해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 ▷2003년(전북 부안) 등에 걸쳐 수차례 부지 선정을 추진했으나 매번 주민 반대에 막혀 무산됐다. 당시에도 지금의 고준위 특별법과 같은 법적 근거는 모두 있었다.
만약 영구처분시설은커녕 중간저장시설 입지 선정부터 주민 반대 등으로 난관에 직면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면 2021년 말 부산에서 강하게 제기됐던 ‘고리원전 핵폐기장화’ 우려는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고준위 특별법이 ‘양날의 검’으로 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시민사회 곳곳에서 제기되는 이유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 수용성이다. 과거에는 부지 선정에 왜 실패했는지 등을 철저히 분석해 이해당자사 간 갈등이나 주민 반발을 최소화해야 한다. 김현권 고준위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2월 회의 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과학적인 근거와 국민적 신뢰·소통을 바탕으로 고준위 방폐물 관리 정책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 과거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단순히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석주 세종본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