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 유산’이 국가유산청의 세계유산 우선 등재 목록에 선정된 것은 부산의 고난 극복 서사와 인류 평화의 가치를 국제 사회에 증명할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신호다. 이제 ‘피란수도 부산’은 과거의 기억에 박제된 유산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서사 자산이자 미래 도시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었다. 부산시는 이번 등재 추진을 통해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피란민을 품어 대한민국을 지탱한 부산을 ‘국제 연대와 평화의 상징’으로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1023일간의 피란수도 시기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품어낸 포용의 시간이었고,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삶의 희망을 만들어낸 융합의 용광로였다. 당시 부산은 유엔군과 미군 부대가 주둔하며 서구 문물이 유입되던 유일한 통로이자 거대한 항구였다. 우리 국민이 세계를 향해 눈을 뜬 지점이자, 동시에 전 세계가 한국을 인식하게 된 역사적 조우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처럼 안으로는 민족을 품고 밖으로는 세계와 교감한 역동적인 역사야말로 부산이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언어이며, 이 유산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기획된 축제가 바로 ‘피란수도 부산 국가유산 야행’이다.
그러나 유네스코 등재라는 본궤도 진입을 앞둔 지금, 이 축제가 과연 부산의 대표 역사·문화 가치를 담고 있는지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이미 서울의 ‘한양도성문화제’나 ‘인천 개항장 문화유산 야행’, 그리고 정조의 정신을 담아낸 ‘수원 화성 문화제’ 등은 화려한 연출이나 외형적 규모에 치중하기보다, 시민이 ‘우리 도시의 이야기’라고 자부하는 인문학적 철학과 공감을 깊이 심어둠으로써 지역 대표 축제로 안착했다. 반면 부산의 야행은 여전히 공허한 측면이 적지 않다. 피란수도라는 역사적 자산은 부산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에도, 현재의 축제는 시민 삶과 정서에 깊이 닿지 못한 채 겉도는 모양새다. 이는 단순히 홍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유산의 가치를 담아내는 구조적 접근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기획과 실행 전 과정에서 인문학적 깊이와 지역 전문가의 실질적 참여가 구조적으로 결핍된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 피란수도 부산은 단순한 관광 소재가 아니라, 전쟁의 상처와 국제적 연대, 예술과 지성의 재편이 층위별로 중첩된 매우 무거운 역사적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간의 피란수도 야행은 이러한 무게를 수용하기보다 경관 조명과 일회성 공연 등 소비적 형식에 치중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전문가의 목소리가 배제된 구조적 한계가 지속된다면, 축제의 진정성은 사회적 맥락과 단절된 결과물로 파편화될 것이다.
이제 ‘피란수도 부산 국가유산 야행’은 유산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인문적 플랫폼’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유네스코 등재는 행정적 절차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유산이 오늘의 시민에게 어떤 공감의 언어로 살아 움직이는지가 중요하다. 현장에서 전문가의 비평이 살아 숨 쉬고 시민이 의미 해석의 주체로 참여할 때, 부산의 진정성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피란수도 연구 전문가 중심의 상설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행사 대행업체를 선정한 뒤 자문을 덧붙여 외형만 갖추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전문 문화기획자와 연구자가 소속되거나 연계된 업체를 선정하고, 관련 작업을 해온 문화예술가들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피란수도 부산의 가치를 기리는 축제는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도시의 정신을 담은 정교한 서사로 완성될 수 있다.
공간의 서사성 역시 강화되어야 한다. 임시수도기념관 등 핵심 거점은 단순한 야경 명소가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와 문화의 힘을 재조명하는 사유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야경은 역사의 장면을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된다. 나아가 UN기념공원 등과 연계한 국제 프로그램을 확장해 부산이 지닌 포용과 공존의 가치를 세계적 서사로 키워나가야 한다.
결국 숫자의 흥행이 가치의 등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유네스코가 주목하는 것은 외형적 화려함보다 유산이 시민의 삶 속에서 얼마나 생생한 기억으로 작동하는가이다. 부산의 수많은 축제 중 피란수도 야행은 그 결을 달리해야 한다. 축제라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도시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시민의 정신적·정서적 자긍심을 결집하는 유일무이한 서사적 토대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피란수도 부산 국가유산 야행은 연출 경쟁이라는 해묵은 문법에서 벗어나 전문가의 통찰을 담고,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시민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부산다움’의 서사로 승부해야 한다. 피란수도 부산 역사는 부산만의 과거 전유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한국전쟁 속에서도 인류애를 실천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기에, 전 세계와 정서적으로 연대하고 공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평화의 메시지로 거듭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