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라는 건 단순히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짧게는 우리 집에서 옆집으로, 멀리는 옆 마을이나 더 먼 지역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자 행위다. 걷기는 대단해 보이는 일이 아니어서 걷기 자체가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출근길에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걷는 일, 가까운 마트로 장을 보러 가기 위해 걷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이다. 그런데 이제 어딘가를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닌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특별한 경험이 되는 시대다. 걷기라는 인간의 보편적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상의 걸음이 이어지면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졌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 그랬고 나라 구석구석을 잇는 길도 그랬다. 조선시대 주요한 간선도로였던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동래를 연결했다. 영남대로의 대부분은 현재의 도로체계에 포함되며 사라졌다. 그렇지만 험지를 지나던 경북 문경의 토끼비리나 경남 양산의 황산잔도, 밀양의 작원잔도로 그 흔적을 남겼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지니 사이에서 ‘꿈의 발자취’로 ‘송라인’처럼 보이지 않는 길도 있지만 인간의 발걸음에 따라 길은 유형의 실체를 지닌다.
자동차와 속도가 우선인 세상에서 두 발로 걷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런 이들이 직접 만든, 또는 이런 이들을 위해 만든 걷기 위한 길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런 길이 생겨났고, 그 길을 걷는 사람도 빠르게 늘어났다.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라는 말이 있다. 길을 걷는 목적은 제각각이겠지만 길이 주는 치유, 길에서 느끼는 만족감, 힘든 길을 마쳤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작은 보상이 된다.
우리나라 걷기 열풍의 시발점인 제주올레를 비롯해 전국 대부분 트레일이 완주자에 대한 인증을 한다. 전체 코스 길이는 트레일에 따라 다르지만 짧게는 150㎞ 안팎에서 길게는 코리아둘레길의 4500㎞까지 다양하다. 가장 짧은 트레일조차도 일주일 이상 온전히 쏟아부어야 완주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대부분 트레일에서 완주인증서와 기념품을 유무상으로 제공한다. 사실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 DMZ 평화의길처럼 각각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쉽지 않은 코리아둘레길 완주는 우리나라 트레일 가운데 최고의 성취감을 준다. 우리나라 트레일 가운데 유일하게 별도 공간을 마련해 명예의 전당을 운영하기도 한다. 부산 남구 오륙도 입구의 해파랑길 안내센터가 그곳이다. 마찬가지로 부산 갈맷길도 278.8㎞를 완주한 도보 여행자에게 완주인증서와 기념품을 제공한다.
그런데 걷기 자체가 목적이 아닌 사람이 있다. 완주 인증이 목적인 셈이다. 대부분 도로와 멀지 않은 트레일의 특성상 도보가 아닌 자전거, 심지어는 차량을 이용해 코스 인증을 하는 이가 심심찮게 있어 완보인증기관의 골머리를 앓게 한다. 차를 타고 와서 인증대에서 스탬프만 찍고는 바쁘게 떠나는 이를 봤다는 도보여행자들의 목격담을 흔히 듣는다. 혼자 10여 권의 스탬프북을 찍고 갔다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스탬프 대신 휴대전화를 이용한 큐알로 인증을 하는 한 장거리 트레일의 완주자들 사이에서는 장거리 트레일을 걸으러 가는 지인에게 휴대전화를 맡겨 인증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람 대신 휴대전화가 대신 걷는 셈이다.
도보여행길인 트레일을 걷는 일은 길을 걷는 사람과 길 주변에 사는 사람, 자연을 하나로 만들며 걷는 이에게는 무상의 보상을 주는 일이다. 흔히 등산을 두고 ‘무상의 행위’라는 말을 한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등반가 리오넬 테레이는 등산을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으로 정의하며 등산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자기 자신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등산’을 ‘도보 여행’으로 대치해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1988년 2월 제15회 동계올림픽에서 전위적인 등반으로 히말라야 8000m 거봉 14개를 처음과 두 번째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와 예지 쿠쿠츠카에게 은메달을 수여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메스너는 “등반은 싸우는 상대가 없고 심판도 없다. 단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면서 수상을 거부했다.
장거리 트레일을 여러 날에 걸쳐 걸어 완주하는 일은 메스너의 말처럼 자기와의 싸움에 이긴 일이며 명예로운 일이다. 완주인증서와 기념품은 그 명예에 따른 부차적인 일이다. 그런데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은 요즘 세태에 씁쓸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냥 이런 세상이 돼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 따름이다. 리오넬 테레이가 자서전 ‘무상의 정복자’에 썼던 글을 바꿔본다. ‘도보여행길 걷기는 자기 과시가 아니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순수하고 신중한 도전 행위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