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해사기구(IMO)가 제시한 2050년 탄소중립 목표는 선박의 외형 변화나 운항 방식 개선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 친환경 연료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연료 저장·공급·제어 기술체계의 안전성과 신뢰성이 전제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변화의 무게중심은 점차 선박에서 조선기자재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선박이 연료를 사용하는 주체라면, 조선기자재는 연료를 저장하고 공급하며 제어·계측·감시하는 기술의 집합체다. 메탄올·암모니아·수소 등 대체연료 논의가 본격화될수록 기술적 리스크와 규제 이행 부담은 선박 자체보다 선박 내부 시스템을 구성하는 기자재 단계에 먼저 집중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IMO가 추진 중인 Net-zero Framework, 지속가능연료 인증제도(SFCS), 연료전주기 라벨(FLL)은 모두 선박을 규제 단위로 설정한다. 그러나 제도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연료탱크와 배관 펌프, 제어·계측 장치, 모니터링 시스템 등 기자재 단계에서 연료 사용과 관리가 가능하도록 기술적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규제의 대상은 선박이지만, 구현의 무게는 기자재에 실리는 이유다.
이로 인해 조선기자재 산업의 경쟁 구도 역시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단품 성능과 가격 중심의 경쟁에서 벗어나 설계·제작·운용 전 주기에 걸친 안전성과 신뢰성을 입증하는 능력이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제어·계측·감시가 가능한 모니터링 시스템은 규제 대응과 안전 확보를 동시에 요구받는 영역으로, 향후 시장 변화가 가장 먼저 가시화될 분야다.
대체연료 확산과 함께 기자재 안전 기준 정비도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급변하는 국제 환경과 정세에 발맞추어 기존 연료의 사용을 줄이고 많은 종류의 대체연료와 이를 운용하기 위한 기자재의 개발이 선행되고 있다. 아울러 선박과 같이 제한된 공간과 외부 환경적 요인에 좌우되는 상황에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IMO 화물·컨테이너 운송 전문위원회 등에서는 수소·암모니아 등 연료 관련 안전지침을 단계적으로 마련 중이다. 저온·고압·독성 등 새로운 위험 요소를 동반하는 연료 특성상 기자재 단계에서의 초기 설계 완성도는 운항 이후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를 좌우한다.
이제 정책의 초점은 보다 분명해져야 한다. 정부 연구개발은 단일 부품 개발을 넘어 연료 특성별 시스템 검증과 시험·인증 체계, 국제 기준 및 표준을 선제적으로 구축하는 방향으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특히 국내에서 성능과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할 수 있는 시험·평가 인프라는 중복 인증 부담을 줄이고, 기자재 기업의 해외 시장 진입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기반이 된다.
글로벌 물동량의 증가와 함께 초대형 컨테이너선, 친환경 연료 추진선박, 극지 및 자율운항 선박 등 전세계 동시다발적으로 신기술의 수요와 개발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견인하기 위해 유럽연합(EU) 미국 영국 등 주요국은 IMO ISO 등 국제 기준과 표준을 통한 시장 선점, 독점을 하고자 한다. 주요국의 법규, 국제 표준, 글로벌 규제 동향을 면밀히 검토하고 국내 적용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며, 대표적으로 중소벤처기업부 및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을 중심으로 수행 중인 ‘액체 수소 및 암모니아 해상운송 관련 법제도 사각지대 식별에 관한 연구’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여러 대체연료가 동시에 논의되는 상황에서 기자재 기업이 어느 한 방향에 선제 투자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LNG 연료 전환과 달리 기술 표준과 시장 방향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의 투자 부담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 친환경 연료 전환은 선박에서 시작되지만,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기준은 기자재 산업의 기술 준비 수준과 제도적 대응 역량에 있다. 국제 규범 이행이 본격화될수록 기자재 산업을 뒷받침하는 정책 선택과 인프라 구축의 속도가 곧 국가 조선산업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배정철 한국조선해양기자재 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