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민의 90%가 ‘원전이 필요하다’, 60~70%가 ‘신규 원전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는 여론조사가 다수 언론에 보도됐다. 수치만 보면 원전 확대에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듯 보인다. 그러나 부산·울산·경남 주민의 시선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조사는 원전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과 목소리를 사실상 지워버린 조사이기 때문이다.
원전은 추상적인 정책이 아니다. 고리·신고리원전 인근 주민에게 원전은 삶의 조건 그 자체다. 방사능에 대한 불안, 사고 위험, 지역 이미지 훼손, 정주 여건 악화, 재산 가치 하락 우려는 이 지역 주민들이 수십 년간 감내해 온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번 여론조사는 전국 평균 수치만 제시했을 뿐, 원전 입지 주민의 실제 인식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후부가 여론조사 결과를 이틀에 걸쳐 나눠 공개하며 사실상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점이다. 첫날에는 전국 찬반 비율을 부각해 원전 찬성 여론이 압도적인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었고, 다음 날에는 지역별 분석을 추가 발표해 ‘원전 밀집 PK·TK, 수도권보다 신규 건설 더 지지’라는 제목의 기사도 등장했다. 전체 응답자 약 1500명 가운데 부울경 표본은 224명, 대구경북은 145명에 불과했다. 이를 근거로 ‘지역 여론’이라 일반화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부울경 인구 비율은 15~16%에 이르지만, 이번 조사는 인구 비례에 맞춘 별도 설계 조사도 아니었고, 원전 입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 자체가 없었다. 원전 정책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집단이 배제됐다는 사실은 이번 여론조사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통계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위험과 부담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사안일수록 주민 의견은 더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
질문도 문제다. 정부는 ‘에너지믹스’를 전제로 원전 필요성을 물었다. 사실상 “원전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동의를 구하는 구조다. 핵폐기물 문제, 사고 위험, 입지 갈등, 대안 시나리오 등 핵심 쟁점은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 입지 문제를 배제한 채 “원전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현실 왜곡이다. “수도권에 신규 원전을 건설하는 데 찬성하는가”와 “내가 사는 지역 인근에 원전이 들어오는 데 찬성하는가”를 물었다면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원전 논의 본질은 ‘필요한가’가 아니라 ‘누가 위험을 떠안느냐’다.
부울경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원전 밀집 지역이고 사용후핵연료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설계수명 40년을 넘긴 고리2~4호기 수명 연장이 계속 추진된다. 부산지역 시민단체는 이를 ‘환경 내란 지속’이라 보고 고리2호기 수명 연장 무효소송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도 김성환 기후부 장관이 지난 26일 신규 원전 2기 건설 추진을 언급한 것은 지역 현실과 시민 정서를 외면한 발언이다.
에너지 정책은 여론조사 숫자로 정당화할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공론화는 전국 평균 수치가 아닌 원전 지역의 목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원전 정책의 정당성은 기술적 안전성 이전에 사회적 정당성에서 나온다. 단순 ‘여론’이 아니라 ‘지역 존중’에서 출발하는 에너지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