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미 간 관세 협상과 글로벌 조선업 재편 흐름 속에서 ‘미국조선산업재건(MASGA)’이라는 단어가 투자자와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다. MASGA는 단기 이벤트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외교·산업전략·투자기회가 한데 얽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통 제조업인 조선업이 다시 국가 전략산업의 지위로 올라서는 분기점이다. 한국 조선업에는 글로벌 확장의 기회가 되고, 미국에게는 자국 조선업 부흥의 동력이 된다.
논의되는 미국의 조선 분야 투자 규모는 약 1500억 달러(약 200조 원)로,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대형조선소가 주요 수혜자로 꼽힌다. 그러나 대다수가 중소기업인 조선기자재 업계는 이러한 훈풍을 즉각 체감하지는 못한다. 국내 조선산업은 극심한 인력난 속에서도 ‘스마트 야드’를 실현하기 위해 로봇 용접, AI 기반 공정관리 등 지능형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변화가 활발하다. 하지만 기자재 기업들은 투자 여력이 부족해 공장 자동화조차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글로벌 시장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친환경 기자재로의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지난달 국제해사기구(IMO) 총회에서 미국의 반대로 ‘넷제로 프레임워크’ 채택이 1년 연기된 것은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 셈이다. 이 기간 조선 해운 전반에서 저탄소 연료 추진기술, 운항 효율화 기술, 배출 저감 기술 등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특히 LNG·암모니아·메탄올·수소 등 차세대 연료 전환과 함께 핵심 품목인 연료공급시스템을 구성하는 기화기 고압펌프 고압가스밸브 등에서 기자재 기업의 기술경쟁력 강화가 절실하다. 이를 위해 국내 조선사와의 동반성장 체계 재설계가 필수적이다. 단가 중심의 조달 방식에서 벗어나 성능·품질 중심의 5년 이상 장기 공급계약, 공동기술개발, 설계 초기 단계 참여 등으로 기술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조선기자재산업은 조선업과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별도의 산업군이며, 중소기업 중심 구조라는 현실을 고려한 맞춤형 정책지원이 없다면 독자적인 수출주도형 산업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조선소 중심의 지원정책만으로는 생태계 전체가 성장할 수 없으며, 기자재 기업의 스케일·자금력·리스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산업 특성을 반영한 정책이 필요하다.
국제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자재 기업 간 신뢰와 협력 없이는 글로벌 경쟁력은 요원하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수십, 수백 개의 부품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산업 특성상 중견기업이 시스템 통합을 주도하고 전문 중소기업이 부품기능을 분담하는 협업형 생태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팀 코리아’ 모델이 정착돼야만 선박용 시스템·모듈 패키지 수출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등 전문기관 역시 기업 경쟁력 강화에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부품 단위 성능시험부터 시스템 단위 육상시험, 실증선박을 활용한 해상실증까지 연계되는 친환경 기자재 원스톱 인증체계를 구축해 선주와 조선소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베트남 등 신흥 조선국은 향후 10년간 급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 국가에 기자재 모듈 패키지 수출을 전략적으로 추진한다면 K-조선기자재산업은 조선소 의존적 구조를 넘어 독자적 글로벌 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
결국 K-조선기자재산업의 지속 경쟁력은 ▷친환경 선박기술 선도 ▷핵심 부품 국산화 ▷조선소·기자재 동반성장 체계 구축 ▷글로벌 OEM 수준의 품질·인증 확보 ▷인력·시험·인증 인프라 강화 ▷중소기업 중심 산업구조에 적합한 정책지원과 기업 간 협력을 기반으로 한 생태계 구축이라는 여섯 축 위에서 완성된다.
MASGA라는 새로운 세계적 흐름은 한국 기자재산업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산업의 실질적 특성을 기반으로 한 정책 재정비, 기업 간 협력 생태계 구축을 통한 속도감 있는 기술투자다. 이것이 K-조선기자재산업이 글로벌 시장을 지속적으로 선도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