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인간의 몫이고, 별과 행성의 궤도는 우주 일이다. 우리 뜻과 상관없이 계절은 돌고, 그렇게 또 가을이 찾아왔다.
‘마차를 세워 앉아 늦가을 단풍 숲을 사랑하니, 서리 맞은 잎이 이월의 봄꽃보다 붉도다’. 두목의 시 ‘산행(山行)’의 한 구절이다. 사람들은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이 구절을 떠올린다. 봄의 꽃과 가을의 단풍 둘 다 붉지만, 그 쓰임은 다르다. 봄꽃은 벌을 불러들이지만, 가을 단풍은 자신의 마지막을 바람에 맡긴 채 조용히 떨어질 뿐이다. 하지를 지나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 잎은 푸름을 버릴 채비를 한다. 붉은 잎으로는 더는 광합성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다. 식물의 계절성을 열역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봄은 가을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정도가 아닐까. 가을은 저절로 봄이 될 수 없지만, 그사이 나무는 봄을 준비한다.
지독히도 더운 여름이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제 궤도를 돌았다. 지난여름에 만들어져 장차 꽃을 피울 꽃눈은 이미 물기를 머금고 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남도에서부터 꽃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헐벗은 나무가 꽃을 피우고 잎을 내놓는 데는 기온과 낮의 길이가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저장된 에너지다. 지난해 작황이 좋았던 과실수가 올해는 잠시 쉬어가는 까닭, 그것이 바로 ‘해거리’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주된 영양소인 탄소는 광합성을 통해 식물 스스로 만들어낸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먹거리가 중요하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생식’ 과정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은 엄청난 양의 자원을 할당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한다. 산모의 손발톱은 평소보다 더디게 자라고 뇌의 무게도 줄어든다. 평생 한 번 꽃을 피우는 멜로카나 대나무는 꽃이 떨어짐과 동시에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신의 모두를 쏟아부은 까닭이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뜻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그 소임을 다하고 꽃이 지면 열매를 키우는 몫은 잎이 담당한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광합성을 통해 생명의 결로 바뀌어 설탕으로 흐르다 고체로 저장된다. 우리가 먹는 곡식이 바로 그것이다. 매화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벚꽃 목련 살구 복숭아와 같이 이른 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의 경우를 보자. 중국 연구자들은 꽃과 잎이 낮의 길이에 의존하는 정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른 봄 서둘러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은 햇빛의 양이 적을지라도 기꺼이 자신을 열지만, 잎은 빛의 양을 좀 더 필요로 했다. 그것이 식물의 ‘생식 전략’이다. 추론해 보면 잎이 없으니 꽃가루가 바람에 실리기 좋고, 이른 봄날의 벌과 나비를 먼저 맞을 수 있다.
여름이나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잎이 생산한 탄수화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지만, 봄에 서둘러 꽃을 피우는 나무는 지난해 저장해둔 에너지 말고는 여유가 없다. 그래서 잎 없이 꽃을 피우는 행위는 무척 ‘위험한 아름다움’이다. 광합성 공장이 없어 벌에게 제공할 꿀도 많이 만들 수 없지만, 벌은 먼 거리 날갯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춘궁기를 함께 넘기는 동식물의 공생 방식이다. 이런 생물학적 안타까움은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모든 식물의 공통된 운명이다. 지난해에 쟁여 두었던 자원을 총동원하면서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운 식물은 봄을 ‘맞이하는’ 대신 스스로 굳건히 ‘세워’ 간다. 소리 없이, 그러나 솟아오르듯 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가을의 단풍이 결국 저의 붉음을 다하고 스스로 떨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준비의 다른 이름이다. 이 단순한 사실 속에는 우리가 잊고 사는 자연의 섭리가 숨어 있다. 꽃을 잎보다 먼저 피우는 식물은 무모해 보이지만, 그건 생명의 전략이자 믿음의 표현이다. 세상이 차가워도, 자신의 때가 왔다고 믿고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며 피어나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도 필요해 보인다. 때로는 그저 자연의 리듬에 귀 기울이며 각자의 자리에서 봄을 맞이하는 대신,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봄을 세워(立春)나가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