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맨해튼은 도로가 네모난 퍼즐 조각으로 된 대표적인 격자 도시다. 무려 2000여 개의 격자가 거대 도시 맨해튼의 내부를 반도체처럼 짜여서 도시를 이루고 있다. 중간에 브로드웨이라는 도로만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 도시가 초고층 건물로 채워진 적층형 도시다. 격자와 적층 도시의 기원은 기록상으로는 그리스의 식민도시 밀레투스다. 이후에 만들어진 로마와 제국들의 격자와 적층 도시들은 밀레투스의 설계도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라비아 사막에 흩어진 국민을 거대한 격자와 적층의 도시 공간 안으로 집어넣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바로 네옴시티라는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을 앞세우고 인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며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대혁신의 시기에 왜 격자와 고층화의 적층 도시 전략이 강력한 도시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는가. 들여다보면 도시 건축의 기초인 벽돌이나, 자율 이동 지능의 컴퓨팅 기반인 반도체나 실은 모두 형태가 적층의 격자다.
그러나 부산의 도시 발달 과정을 보면 마을들이 자연과 산세를 점점 차지하며 정주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사용하여 길게 늘어진 세장형(細長型)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몰려든 피난민이 삽시간에 부산 일대 산이나 비탈로 올라가 거주지와 생활 터전을 급조하느라 도시 기반이 취약하다. 원 도시의 산복도로나, 문현동에서 적기(赤崎·감만동 우암동 일대) 용호동 해운대로 이어지는 해안가 구간이나, 영도 일대, 남부민동 송도 감천 등으로 이어지는 해안가 일대가 그렇다.
이런 방식의 도시 연결은 어느 한 곳의 우월한 장소가 힘을 집중하면 인근 지역 발전 여력을 흡수하고 나아가 세가 약한 지역을 소멸시킨다. 1990년대 이후 수영만과 해운대 일대의 고층화된 도시 신설은 인근 지역에서 자체의 격자와 적층의 도시를 스스로 갖지 못한 문현동 감만동 우암동 재송동 민락동 일대의 도시 상업성과 주거 발달성을 흡수해서 원 도시의 변화와 성장을 저해한 측면이 아주 크다.
부산의 원 도시 지역은 오래된 거주지인 데다 상업항으로서의 국제항구를 연하고 있다. 이런 곳이라면 국제적인 항구 도시에 가보면 가장 밀집이 강력하고 번화하고 지가도 높은 곳인데, 부산은 유독 그렇지 않다. 1990년대 이후 미개발지가 많은 동래 수영만 해운대 광안리 부근에 고층 주거 도시를 접어 넣어 역사를 가진 원 도시 지역을 고사시킨 때문이다. 과거에 부산항만의 도시 생산성을 들자면, 남포동 광복동과 국제시장 등이 좁지만 격자와 적층으로 도시를 안으로 채워 좋은 성과를 거둔 곳이며, 서면도 뒷길의 격자망이 받쳐주어 부도심 성능을 보여주었다.
산복도로나 해안가, 골짜기를 연한 부산 마을들의 발달은 그런 점에서 취약한 곳이 한두 곳 아니다. 부산시청이 옮겨간 곳이 시청의 위용을 살려 더 번듯한 도시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그곳이 원래 격자와 적층의 도시 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은 초량과 서면과 동래를 지나가는 통과 지역의 길목이었다. 도시는 역사와 자연을 등한히 하고 마구 만들면 안 된다.
이게 바로 도시국가로서의 세력과 이미지 차이가 뚜렷한 싱가포르와 홍콩이 같은 적층 도시이지만 결정적 성과의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다. 싱가포르는 전 구간이 격자에 적층이고, 홍콩은 부산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장형 적층의 자연산이다. 그런 데다 홍콩은 이젠 도시국가로서의 자율성마저도 중국으로 넘어간 상태다.
부산에는 지금 격자형 도시망은 있으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사상구 학장동 감전동 주례동 일대다. 이곳은 도시공업 지역으로 지정되어 그동안 도시산업 구역으로서의 역할은 지대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그 본래의 기능이 퇴색된 지역이다. 그런데 도로망은 귀하게도 격자로 잘 구성되어 있지만 도시 전반이 저밀도다. 부산시가 서부산 발전을 위해 이곳에 서부산청사(시 일부 부서와 산하 기관 입주 예정)를 설치하고, 스마트 도시로의 재생에 힘쓰고 있는데, 아직 속도나 성과는 아쉬워 보인다. 여기에다 민간의 재건축을 촉진해 적층화 정책을 가미하면서 더 역동성 있게 조건을 만들어 주면 이 도시 구역은 젊은 시민과 첨단 생산성의 구역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사실 서부산 일대는 이전에도 산업 용지로서 역사가 깊고 성과도 좋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애용하는 제품 중에는 전에 없던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가 눈에 뜨인다. 미국 브랜드는 대개 해외 OEM 생산이지만, 지금은 실제 미국에서 만드는 물건이 늘어나고 있다는 증표다. 최근 미국의 생산 지역들도 주로 도시 안에서 부활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미국같이 오래된 선진 공업국들이 다시 도시 안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는 배경에는 4차 산업혁명으로 산업기술, 소재, 에너지 혁신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선진국 증시의 동반 호황은 이러한 선진국 생산성 부활이란 서사를 담고 있다.
지난날 생산 도시의 위용을 지닌 부산이 이제 ‘메이드 인 부산’으로 재무장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부산항과 도시 전체가 생산성 증강을 무기로 다시 문전성시를 이룰 절호의 시기가 이렇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