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부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던 시기, 수습을 막 뗀 기자는 정상회의장인 벡스코 주변 수영교에서 노동자 농민 반세계화단체가 연 대규모 집회에 투입돼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늦은 밤 길바닥에서 차디찬 바람을 막으려 머플러로 얼굴을 둘러싸고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본지에서 만든 AEPC 특집판을 회의장 주변 곳곳에 배포한 기억도 난다. 브루나이 국왕이 얼마나 갑부인지, 전용세단과 모터사이클이 몇 대나 되는지 등 부산을 방문한 해외 정상들의 면면을 담은 타블로이드판은 꽤 인기가 있었다. 해외 정상들이 부산에 집결한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하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한다는 시민의식 같은 것이 솟아났던 걸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25년 11월. 이번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서 경주 AEPC 정상회의를 취재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K-컬처를 비롯해 K(대한민국) 브랜드의 위상이 몰라보게 높아진 가운데 치러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국제미디어센터 인근 K-푸드 존에는 외국인 방문객이 넘쳐났고, 엑스포공원 근처 기업관에 마련된 첨단 제품들이 방문객의 눈길을 끌었다.
당초 치열한 유치경쟁 속에 경주가 개최지로 결정됐을 때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국내에선 손꼽히는 관광지이지만 큰 국제행사를 치르기에는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때문이다. 정상을 비롯한 정부 대표단, 기업인 등이 한꺼번에 모이다 보니 숙소 부족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촉박한 시간 속에 리모델링이 이뤄졌고, 크루즈까지 동원됐다.
정상회담이 경주에서 치러지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도 낙수효과를 봤다. 상당수 정상들이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거나 출국했고, 일부 정상은 부산에 숙소를 잡기도 했다. 여기에 세계인의 이목이 쏠린 미중 정상회담이 김해공항에서 열리면서 패권경쟁을 벌이던 G2가 휴전을 이룬 역사적 장소로 기억되게 됐다.
정상회담 무대가 된 천년고도 경주는 역사와 문화의 고장인 만큼 독특한 운치가 있었다. 한미·한중정상회담이 치러진 경주국립박물관 내 천년미소관은 한옥의 미와 품격을 잘 보여줬다. 환영식 장면을 중계하던 아나운서가 “정상회의장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APEC 회의는 끝났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 신라 금관 특별전을 보기 위해 경주국립박물관에 긴 줄이 서고, 시진핑 주석이 맛있다고 한 ‘황남빵’ 주문이 밀려들고,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이 구매한 올리브영 화장품 리스트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런 스토리들이 경주를 풍요롭게 하는 자산이 되고 경주를 찾고싶게 만드는 유인이 될 것이다.
이번 APEC 정상회의를 마무리하며 각국의 합의를 거쳐 도출한 ‘경주 선언’ 마지막엔 이런 문장이 들어있다. ‘정상회의를 위한 따뜻한 환대와 철저한 준비로 성심껏 맞아주신 경주 시민과 경주시에도 진심어린 감사의 뜻을 전한다’. 개최국 뿐만 아니라 개최도시에까지 감사를 표한 게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정상 선언문에 쓰는 의례적 표현이냐”는 본지 질의에 대통령실은 “다른 회의 때도 이런 표현이 들어갔는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경주시민의 시민정신에도 각별한 감사를 표해야 겠다는 취지로 쓴 것은 맞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 한일 정상회담이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열리며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신임 일본 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셔틀외교 지속에 공감대를 이루면서 다음 정상회담은 일본의 나라현에서 갖기로 했다. 수도가 아닌 지역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전통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어서 상징성이 크다.
이번 APEC을 통해 경주의 경쟁력과 브랜드 가치가 크게 올라갔다. 앞으로 많은 국제행사들이 지역에서 치러져 지방도시들의 매력을 알리고,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K-팝, K-푸드, K-뷰티 뿐만 아니라 K-로컬의 힘이 전 세계에 알려졌으면 한다.
정유선 서울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