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단순히 권모술수의 상징이 아니다. 그는 조국 독립과 번영을 위해 냉혹한 현실을 직시한 정치사상가였다. 16세기 이탈리아는 강대국 침탈로 국가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가 ‘군주론’과 ‘로마사논고’에서 설파한 것은 부패한 이상주의 타파와 현실적 역량의 회복이었다. 특히 그가 주목한 로마 공화정의 핵심은 권력 균형과 자국 방위력, 안정을 위한 실용적 지혜였다. 누가 더 도덕적인가를 따질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없는 국가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외교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
| 이재명 대통령이 2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번 주 열리는 ‘정상회담 슈퍼위크’는 각국 외교 역량의 시험대다. 27일 말레이시아 아세안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부산 미중 정상회담에 이어,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까지 정치·안보·무역이 맞물린 외교 대전장이 펼쳐진다. 강대국들이 서로 힘 자랑을 하는 가운데 한국은 ‘무대 제공자’가 아니라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정의 최대 관심은 단연 30일 예정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회담이다. 트럼프 2기 들어 처음 마주하는 두 지도자는 희토류 통제와 100% 추가관세라는 상호 보복의 칼을 한동안 거두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확전 자제’ 합의 배경엔 양국이 모두 전면 충돌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이 깔려 있다. 중국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아직 미국과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국내 물가 상승 압력과 동맹 피로 누적의 한계를 의식하고 있다. 양쪽 모두 일단 ‘비바람을 피하자’는 현실적 타협점에 도달한 셈이다.
‘현상 유지형 합의’가 오히려 새로운 전략 게임의 시작임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희토류 대체 공급망 구축을 서두르며 호주·일본과 협력망을 짤 것이다. 중국은 동남아와 중동을 향해 새로운 경제권 연결을 모색한다. 미국과 중국의 ‘칼집 휴전’은 일시적 평온일 뿐, 힘의 재배치 작업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자세는 마키아벨리식 현실주의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외교는 이상이 아니라 힘과 균형의 산물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번 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잇따라 만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약 500조 원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포함한 무역 협상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협상 타결을 강하게 압박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단기 이익보다 장기 전략을 우선해야 한다. 눈앞 성과에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국익을 놓칠 수 있다. 미중 경쟁이 구조적 장기전에 돌입한 만큼, ‘모두와 친구가 되는 외교’보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외교’가 필요하다.
11년 만인 시진핑 주석의 국빈 방한은 한중 관계의 복원과 재조정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무역과 공급망 문제는 물론 서해 구조물 설치, 대북 문제 등 안보 현안이 얽혀 있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인 중국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도 고민해야 한다. 혈맹인 미국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멀리 할 수 없는 중국이다. 미국과 중국이 모두 한국을 ‘전략적 필수 파트너’로 인정하는 지금, 한국은 이 기회를 ‘균형의 창구’로 활용해야 한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열려 그 상징성이 크다. 천년고도 경주는 문화와 역사의 중심지다. 이제는 21세기 동북아 외교의 허브로 주목받는다. 미·중·일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은 한국 외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과에 따라 국제경제 질서의 향방까지 좌우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부산에서 ‘확전 자제’ 원칙을 재확인하고, 한미·한중 간 실질 합의가 만들어진다면 이번 슈퍼위크는 위기 관리의 성공 사례로 남는다.
그러나 외교 본질은 결과보다 과정이다. 눈앞 합의문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어떤 원칙으로 거대한 외교 장기판을 다룰지의 문제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공화적 역동성’ 즉 국민적 합의와 자주적 판단 위에 세워진 전략만이 지속 가능하다. 국제 관계는 감정이 아니라 이해 관계의 수학이다. 이재명 정부가 한미 동맹의 미래지향성을 강화하면서도 중국과의 채널을 유지하려는 노선은 바로 그 수학적 균형의 시도라 할 수 있다.
경주와 부산에서 열릴 이번 담판은 한국 외교의 역량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냉정한 현실 감각 위에 품격 있는 전략이 결합될 때, 작은 나라도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한국은 그 전환점에 서 있다.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강조했던 자주적 군대와 자주적 국가의 정신을 되새길 때다. 주변 강대국이 아무리 요동쳐도, 스스로 중심을 잃지 않는 한 한반도 외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최현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