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던 모든 것이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공백을 빠르게 메우기라도 하듯, 이재명 정부는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과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등 민간 출신 인사를 내세워 AI 패권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AI 양강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AI 3강’을 국가 비전으로 제시하며 이를 맹렬히 추격 중이다. 수석과 장관, 과기혁신본부장 등은 연일 현장을 찾아 대학 및 기업과 간담회를 갖고,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으려는 모습으로 민간 출신 인사들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있다.
특히 정부는 100조 원 규모의 민관·공공 투자, AI 반도체 기반 데이터센터 구축, 한국형 거대언어모델(K-LLM) 개발 등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며 결코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은 AI 기술과 민간 주도 개발에 치중한 나머지 기초연구, 응용, 산·학·연·관 연계, 인재 양성, 규제 개선 등에 대한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AI 기술이 성장하려면 기초연구 인프라 인재 제도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탄탄한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 특정 핵심 기술만 강조하고 전체 연구개발 시스템을 소홀히 한다면 국가 과학기술은 쉽게 방향을 잃고 흔들릴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난 수년간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R&D 예산이 대폭 삭감되며 기초과학과 창의적 탐구가 위축됐고, 단기 성과 중심 압박은 젊은 연구자들의 이탈을 불러왔다.
우리가 추격하려는 미국과 중국은 이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미국은 과학기술부가 존재하지 않는 대신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이 부처 간 협력을 조정한다. 각 부처의 전문성을 토대로 대통령실이 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조율하기 때문에 변화에 신속히 대응하고 민관 협력이 원활하다. 중국은 과학기술을 국가와 정치 목표 실현의 핵심 요소로 보고, 중앙과기위를 중심으로 전략을 주도한다. 기초과학 응용연구 첨단기술까지 국가 전략에 따라 체계적으로 연계·협력하며, 각 분야별 거시적 계획과 방향을 명확히 설정한다. 정치 체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단단한 기반 위에서 과학기술이 성장하는 모습은 부럽다.
분야별 전문성 존중과 협력, 거시적 계획 및 투자 전략을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이 AI 강국으로 발돋움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현장 존중과 협력보다는 정부 주도의 공급자 시각에서 연구개발이 기획돼 일부 기술 위주의 투자, 부정행위 방지 명목의 과도한 행정 부담,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과제 중심 재정지원으로 연구가 분절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제는 연구자와 전문가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정책 결정에 반영되는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다. 정치·행정 중심의 일방적 결정 구조로는 연구 현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범위가 넓고 복잡해 한 부처에서 조정하기 어렵다. 연구 생태계가 함께 성장하려면 소통과 조율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허브가 필요하다.
지난 7일, 충북대에서 열린 ‘새 정부의 기초연구 진흥 방안’ 현장 간담회에서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은 “기초연구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영역인 만큼, 연구자들이 예측 가능하고 자율적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며 “기초연구 생태계의 회복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방안을 11월까지 수립할 계획”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이재명 정부가 목표로 하는 ‘현장 중심’ 과학기술 실현을 위해서는 폭넓은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정책에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현장 역시 시스템 구축 과정에 적극 나서 정책 설계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과학기술은 단순히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가 지식과 진실을 대하는 태도이며,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 방식이다. ‘지속 가능하고 단단한 과학 생태계’는 우리 시대가 미래에 전할 수 있는 유산이다. 무너진 연구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AI 강국으로 가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