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참담하기 그지없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올해 8·15는 정말로 자축할 만하다고 느낀다. 어언 8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광복을 맞이한 것 같다. 물론 아직 청산해야 할 역사적 빚이 적잖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난관을 어지간히 해소하고 이제 말 그대로의 ‘광복’으로 향한 길이 활짝 열렸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강박적인 약소국 의식이나 열패감에 휘둘리지 않고 인류 공동체의 어엿한 일원으로 보편적 견지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격동의 80년 세월이 아쉽지 않은 최고의 성취일 것이다.
이처럼 뜻 깊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절실해진 것은 8·15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는 일이다. 이는 단지 과거에 대한 회고와 연민이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묻는 작업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사실상 제대로 된 광복의 날이 아니었다. 광복군이 해방군으로 도착하기 전에 일제가 전격적으로 미군에 항복하는 바람에 한반도는 일시적이나마 외세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8·15는 뚜렷한 세계사적 분기점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이 호령하던 시대로부터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양분한 ‘냉전’의 시대로 급변하는 출발점이었으며 그 여파는 이곳 한반도에서 강렬하고 치명적이었다. 수십년간 식민 통치에 시달려온 가련한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또다시 모든 것이 뒤집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과연 이 가공할 대전환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계사적 차원으로 보자면, 냉전은 그 직전의 제국주의 시대를 급격히 종결지으면서도, 또한 그 역사적 유산을 이어간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제국주의는 서구 근대문명이 발명한 인종주의와 역사적 진보의 논리를 바탕으로 제국과 식민지의 위계를 고수하는 체제였다. 이 체제 안에서 열등한 종족으로 간주된 식민지 피지배자들이 운명을 바꿀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냉전은 핵무기의 공포를 기반으로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소련이 전 세계를 자기 앞에 줄 세우는 체제로,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신생 독립국은 친미 자유진영에 줄을 서는 한, 번영의 가능성을 조금은 얻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처럼 시대 간의 차이는 있지만 냉전기는 제국주의 시대를 잇는 측면도 있는데, 서구 근대문명의 특징인 자기중심적 대결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성장지상주의 논리는 냉전기에 이르러 더욱 첨예화되었다. 따라서 제국주의 시대를 특징 짓는 인종주의, 즉 유색인 혐오가 냉전기의 반공주의, 즉 빨갱이 혐오로 고스란히 이어진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이 앞뒤 시대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바로 2차 세계대전이다. 제국주의 간 패권 경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은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제국주의 시대는 급격히 저물었다. 그 대신 자유주의, 공산주의, 극우 파시즘 진영이 3자 구도로 각축전을 벌이다 일시적으로 강력해진 파시즘(나치즘) 세력이 도발하는 바람에 적대적이던 나머지 두 진영이 일시적인 동맹을 맺어 싸운 것이 2차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일제 패망과 더불어, 아니 실은 그 이전부터 미소 간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원폭 투하는 전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불쑥 시작된 냉전은 그 이전의 역사를 덮어버렸다.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땅의 독립운동가들은 오랜 세월 반제국주의 투쟁에 매진했고 공산주의 운동도 반파시즘을 기치로 독립의 대의를 공유했었다. 그러나 8·15를 시발점으로 판도가 급변하면서 이들은 친일파들이 앞세운 반공주의 논리에 따라 타도 대상으로 전락하고 그간의 피맺힌 분투와 열망도 모두 잊혔다. 이러한 기막힌 역전은 여태까지도 대한민국을 잠식하고 있는 불미스러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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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 다시금 80년 전의 8·15를 논하는 것은 냉전기의 부정적 유산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그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그간 심하게 왜곡되어온 독립운동가의 본뜻을 되살리는 작업이 절실하다.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은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인류공영에 기여할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인류적 보편성에 어긋나는 자민족중심주의야말로 제국주의 특유의 대결 논리이며 궁극적으로는 서구적 근대문명의 추악한 민낯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제국주의 논리가 일본과 독일 등의 파시즘 체제에서 극대화되었다고 판단하고 그것에 필사적으로 맞섰던 것이다. 김구 여운형 김원봉 홍범도 김알렉산드라의 깊은 고뇌와 위업을 냉전 반공주의의 잣대로 폄훼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도 사악하다. 이제 친일·냉전 세력의 마지막 발악을 잠재우고 나서 선현들의 원대한 꿈을 되새겨보는 광복 80주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