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8월이다.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것이 1945년 8월이니 올 8월은 꼭 80주년이 되는 셈이다. 일제 시기인 1919년 4월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해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니 영토 국민 주권 등 3요소를 갖춘 국민국가 체제가 완성된 지 77년이 되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국민국가의 수립이 근대화의 지상과제였다. 1912년 일찍이 중화민국이란 국민국가 체제를 수립한 중국은 사실상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체제가 미국에 의해 해체된 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 주권을 회복해 국민국가 체제로 복귀했다.
국민국가 한국과 일본은 1965년 외교 관계를 맺어 6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때로는 역사 문제나 영토 및 안보 문제 등으로 대립해 왔다. 이는 한중관계도 마찬가지고 중일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웃 국가의 숙명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중·일 3국은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협력 논의도 함께 진행해왔다.
1997년 말 아세안(ASEAN) 정상회의에 한·중·일 3국이 처음으로 참가해 아시아금융위기에 대한 공동의 대응과 협력방안을 논의한 이래 2000년 5월 ASEAN+3 재무장관회의를 통해 동아시아 역내 금융위기를 예방하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채택도 함께 주도했다. 2008년 말 이후부터는 한·중·일 동북아 3국이 독자적인 지역협력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2008년 미국 금융권에서 시작된 세계경제위기로 인해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는 가운데, 중국경제의 초고속 성장 등으로 2010년 중국이 미국에 필적하는 G2 국가로 떠올랐다. 이로써 동아시아 경제협력을 넘어 통합을 통해 공동 번영을 모색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이는 2012년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협상 개시로 이어졌다.
2008년 한·중·일 정상회담이 처음으로 열렸고 2009년 한·중·일 3국 정상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에 합의했다. 2011년 3국 협력사무국이 설치된 이후 3국은 동아시아협력과 공동체 구축을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노력을 해왔다. 역내(域內) 국가 사이의 사회·경제적 협력으로부터 지역통합까지 이뤄낸 유럽연합(EU)의 사례는 지역공동체주의가 전쟁과 충돌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1세기 십자군 전쟁 이래 20세기 중반 2차 대전까지 900여 년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에 평화와 안정이 온 것은 유럽연합의 결성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미중 관계가 점점 전략적 경쟁의 형세로 나타나자 동아시아 지역의 협력과 공동체 추구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커지고 있다. 마치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미중 사이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요구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아시아 협력과 동아시아공동체 지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형성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 구축을 위한 필수조건인 만큼 한반도의 번영과 평화를 원하는 우리로서는 동아시아의 협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중 지정학적 경쟁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동아시아 협력과 공동체 구축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나는 ‘동아시아 시민사회’ 특히 한·중·일 시민사회 구성을 제안하고 싶다. 동아시아에는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중·일 시민이 미래지향적인 공통된 인식 가치 규범 비전 등을 가지고 소통과 연대, 협력을 공유해 나갈 수 있는 사회 시스템으로서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화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근대의 정치적 의제가 중요시되면서 ‘국민’의 육성이 강조됐다면, 이제 21세기는 주체적인 개인이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집단적인 의견을 표시하는 시대다. 동아시아 지역은 근대화를 급속하게 진행해왔기에 여전히 사상적으로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민사회가 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바로 이것이 동아시아의 상생과 협력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미중경쟁 시대의 도래, 그리고 동아시아의 많은 혼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시민사회를 더욱 성장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통합된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더욱이 AI 기술의 발전으로 언어의 장벽은 이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국경을 뛰어넘는 ‘동아시아 시민사회’란 새로운 상상을 현실화할 방법을 이제 구체화해 볼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