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은 인류역사상 예외가 없었다. 포르투칼·스페인(15~16세기) 네덜란드(17세기)를 거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18~19세기)은 해군력과 산업혁명을 결합해 세계 경제·정치·문화 패권을 장악했다.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이 항공모함 등 막강한 해군력으로 세계 안보 및 무역 등을 주도하고 있고, 지금은 중국이 해양굴기 전략으로 세계 제2의 해군력 국가로 부상, 미중 해양 패권 경쟁이 본격화됐다. 해양력이 곧 세계 패권의 요체임을 방증한다.
21세기 해양 패권의 새로운 도전자로 부산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2월 부산시가 북극항로 개척을 위한 정책과제 발굴에 나선데 이어 6·3대선 공약에 ‘북극항로 개척’이 나오면서, 지정학적 이점을 가진 부산이 북극항로 거점도시로 부각되면서다. 지역에서는 십수년 전부터 북극항로 거점항구 개발 필요성 등이 논의됐지만, 대선 공약으로 등장하기는 처음이다.
북극항로는 부산항에서 출발해 베링 해협과 러시아 연안 북극해를 지나서 유럽으로 향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다. 기존 부산항에서 출발해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 유럽최대 항구인 네덜란드 로테르담항까지 가는 경로(2만2000㎞) 대비 운송 거리가 약 30~40% 단축(1만3000~1만5000㎞)돼 물류비 절감과 시간 효율성 등에서 뛰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지금 같은 온난화 추세라면 2035년께 여름철 북극해에 얼음이 남지 않을 수 있다고 예상하는데, 이 경우 북극항로는 전 세계 교역 물량의 12%가량이 오가는 수에즈 운하를 대체할 유력 항로로 본다. 실제 2021년 3월 수에즈 운하가 초대형 컨테이너선 좌초로 막혀 일주일 간 양방향 통행이 전면 중단됐을 때, 전세계 선박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멀리 우회하는 등 글로벌 물류 대란을 겪었기에 대체 항로로서 북극항로는 무척 매력적이라는 설명이다.
부산이 북극항로의 거점항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우선 지리적 이점을 든다. 부산은 동북아시아 물류의 핵심 요충지로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지역과 매우 가깝다. 북극항로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최단거리 중간 기착지로서 북극항로의 종점 또는 환적 거점으로 이상적인 위치다. 여기다 물류 인프라의 우수성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항은 지난해 기준 컨테이너 처리량 2430만 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로 세계 7위 항만 도시이며,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2위 환적항만 허브다. 자동화된 부산 신항과 스마트 항만 구축 등 선진화된 인프라에 복합물류·배후단지 등도 잘 구축돼 있다.
부산이 북극항로의 핵심 항만이 된다면 지역균형발전 측면에서도 이점이 많다. 북극항로 거점항구로 부울경(PK)을 개발한다면 수도권을 능가하는 경제 발전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 망국적인 수도권 일극체제를 양극체제로 분산시켜 수도권 집중 및 저출생 문제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한국이 북극해양질서의 플레이어로 부상, 중국의 일대일로와 러시아의 북극개발 전략을 견제할 수 있는 주요 국가가 된다면 부산은 아시아-유럽 해상축의 핵심 도시로 입지를 높일 수 있다.
그렇다고 장밋빛 청사진만 있는 건 아니다. 이 항로는 북극의 얼음 상태와 계절성 등에 따라 안정적 운항이 제한적이며, 러시아 쇄빙선 및 러시아 항만 인프라 등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어 국제 제재나 러시아의 불안정한 정책이 항로 운항을 불확실하게 만들 수 있다. 더 큰 장애물은 미·중·러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불안정성이다. 북극항로는 러시아 영해 대부분을 통과하는 데다, 중국의 일대일로 해상노선 등으로 강대국 간 외교적 충돌에 휘말릴 경우 미국 등 서방과의 외교적 리스크가 불거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극항로 개척은 지정학적 변방에서 중심 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데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일치한다. 최근 ‘대한민국 마지막 기회가 온다’를 펴낸 서울대 김태유 명예교수는 “북극항로 개척이 1000년에 한 번 올 마지막 기회로, ‘대한민국호’의 운명을 결정할 변곡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차기 정권의 최우선 과제로 대러 제재 전격 해제 등 러시아와의 관계 회복을 꼽는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큰 갈등이 없었던 한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후 러시아 재건의 우선 협력국이 될 수 있다며, 한·미·러 합종을 통해 중국 일본보다 먼저 북극항로 개척을 선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북극항로 개척 사업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갈등을 빚어서는 안 된다. 곧 새롭게 들어설 정부는 성장동력을 잃은 채 저출생에 따른 국가소멸 위기까지 거론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북극항로의 필수 경유지인 부울경을 첨단산업 메가시티로 구축, 미래 후손의 장기적 먹거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임은정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