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이맘때 부산 금정구 산성마을에 촬영을 갔었다. 촬영 시작과 동시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촬영팀은 “좋은 그림 나오겠다”며 신났는데 마을 주민들은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산성로’의 교통통제가 시작됐다. 산성마을에서 갇힌 신세가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근심 어린 표정이 비로소 이해됐다. 촬영팀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금정산성막걸리를 빚는 유청길 대표(금정산성토산주)께서 한마디 건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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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마을 눈 내리던 날의 금정산성막걸리 . |
“길도 맥킸고, 눈도 촉촉하이 오는데 그냥 한 잔 빨아 삡시다!” 산성마을 토박이다운 자세였다. ‘한나절 포기한들 인생에 뭔 변고가 있을까?’ 싶어 대표님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덕분에 눈 속에 파묻힌 금정산성막걸리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이날 이후, 겨울에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막걸리를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요즘 우리나라 막걸리의 수준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 품질이 좋아진 만큼 몸값도 그만큼 올랐다. 막걸리 한 통에 1만~2만 원이 예사다. 전라남도 해남군 ‘해창주조장’에서 생산하는 21도짜리 해창막걸리는 양조장 출고가가 무려 110만 원이다. 막걸리의 고급화를 위한 어떤 노력도 나는 찬성한다. 따라서 모든 막걸리를 사랑한다.
부산 사람으로서 금정산성막걸리의 가장 큰 미덕을 꼽으라면 가격이다. 750㎖ 용량의 금정산성막걸리 한 통의 소매가는 여전히 3000원 내외다. 유청길 대표의 고집 때문이다. 서민의 술인 막걸리는 가격도 서민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그래서 품질은 유지하되 원가에 부담이 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좀 촌스럽긴 해도 맛은 여전히 짱짱하다. 가성비로 따지면,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막걸리라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좋은 술에는 그에 걸맞은 안주를 곁들이는 것이 술꾼의 태도. 이맘때 금정산성막걸리 최고의 안주로 내가 꼽는 네 가지는 새우 육젓 어리굴젓 대구알젓 가자미식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이 넷은 모두 젓갈류로 매우 짜다. 밥반찬으로나 어울린다. 그래서 막걸리에 제격이다. 막걸리처럼 걸쭉하고 포만감을 주는 술에는 가볍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음식이 어울린다. 허기는 안주가 아닌 막걸리로 채우고, 안주는 그저 막걸리를 술술 넘기는 도구로 족하다.
그리고 이 넷은 지금부터 맛이 든다. 음력 6월께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잡아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토굴에서 숙성시킨 육젓은 지금쯤 감칠맛은 오르되 톡톡 터지는 육질은 살아있다. 매서운 바람이 불 때 충청남도 서산시 간월도에서 채취한 참굴을 소금에 보름 정도 절인 뒤 태양초로 버무린 어리굴젓의 맛이 드는 것도 지금부터다. 속초에서 함경도 손맛으로 버무린 가자미식해는 동해 바닷물이 가장 찰 때 잡은 물가자미로 만들어야 제격이다. 진해만에서 잡아 경상남도 거제시 외포항에서 경매되는 대구는 산란을 앞둔 지금부터 알이 가장 많이 찬다.
금정산에서 띄운 밀누룩이 만들어 내는 막걸리의 청량한 산미와 풍부한 과실 향은 자기주장이 강한 육젓 어리굴젓 가자미식해 대구알젓과 신통방통할 정도로 궁합이 좋다. 좀 짜다 싶을 땐 초겨울에 거두어서 말린 곱창김 한 조각을 지긋이 혀에 올려보시라. 젓갈의 짠맛도 막걸리의 텁텁함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은은한 바다 내음만 남는다. 그럼 새로운 기분으로 또 한 잔. 그렇게 연거푸 마시다 보면, 이 어정쩡한 계절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