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이 첩첩산중이다. 계엄령 선포와 그에 뒤따른 폭력 사태가 우리 자신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일이라고 믿기에는 사태의 전말이 너무 심각하다. 만약 계엄령 시도가 정녕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공화국에서 허용될 여지가 단 한치도 없는 순전한 ‘내란’이었다면 이렇게 사태의 수습이 지지부진하고 의견이 분분할 리가 없다. 물론 그것이 국민 다수의 뜻에 반하는 폭거임은 틀림없으나 그저 체제의 ‘오작동’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요즘 오랜만에 다시 소환된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구를 음미해 본다. “역사는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소극(笑劇)으로.” 이번 사태가 희극적인 것은 단지 또 한 차례의 탄핵 국면이 도래해서라기보다는 그 탄핵의 대상이 바로 지난번 탄핵 절차의 주역이었던 검찰 출신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는 5·18 학살의 수괴처럼 국민의 뜻에 반해 갑자기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그가 국민의 영웅으로 부상했던 것은 단순히 국민이 오판해서일까? 단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 될까? 심히 불편한 진실이지만, 이번 탄핵은 국민이 국민 스스로를 탄핵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국민은 자신을 닮은 자신의 창조물을 마주보고 있다. 국민은 과연 폭압적 권력의 피해자인가, 오히려 그것의 원동력인가?
‘부르주아’ 헌정질서를 희극적이라고 폄훼했던 마르크스의 진단은 적어도 우리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그다지 틀린 것 같지는 않다. 헌정질서의 파괴가 하필 사법 질서의 내부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법치국가’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이들이 스스로 그것을 무력화했다. 대체 이 나라의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물론 19세기에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혁명적 유토피아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세상사란 어차피 요지경이며 폭력을 이기기 위한 폭력도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좋든 싫든 우리는 주어진 사법 질서에 기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답답한 절차를 감내하며 계속 치켜드는 메두사의 머리를 쉴 새 없이 잘라내야 한다. 물론 그 얼굴을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를 경악시킨 폭력의 진원은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는 우리를 짓누르는 가공할 힘에 노출되어 있다. 지난해 11월에 한 청년이 비명횡사했다. 향년 32세의 강태완 씨는 김제의 한 회사에 취직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특장차와 중장비 사이에 끼여 숨졌다. 그는 몽골 태생이지만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 아동으로 자라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살았다. 29세 되던 해에 그는 보통의 한국인이 되기 위해 낯선 조국인 몽골로 옮겼다가 대학생 자격으로 귀환하여 졸업한 후 인구소멸 지역에 취직된 덕에 겨우 체류 비자를 받았다. 그리고 곧 참사가 일어났다. 평소 태완 씨와 함께하던 인권 단체들이 적극 나서서 회사 측에 책임을 묻고 힘겨운 합의 과정을 거쳐 결국 장례식을 치렀다. 그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온몸으로 겪고서 결국 그렇게 덧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사고가 나기 바로 얼마 전에 그는 이주 아동의 체류권 보장을 위한 캠페인 ‘Let Us Dream’에 참여해 영상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유사하게 숨진 이 땅의 수많은 영령들 중에서 그나마도 약간의 주목을 받은 경우다.
지난 설연휴 아침에도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22세 청년이 원주의 한 석재 공장에서 홀로 작업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온몸이 끼여 비참하게 사망했다. 대부분의 산재사고는 우발적이기보다 인간 경시의 풍조가 낳은 구조적 문제다. 왜 산재사고 중 유독 이주노동자의 비중이 그리 높은가? 그들은 희생되어도 좋은 존재인가? 물론 비참한 현실은 이주노동자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지난 가을부터 대우버스 해고 노동자들은 하릴없이 현장을 지키고 있다. 행정법원에서 회사 측이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위장 폐업했음을 인정해 그들에게 복직의 기회가 열렸으나 사측은 곧바로 항소했다. 함께 싸우던 동지들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떠난 현장을 노조 간부 몇 명이 힘겹게 지키고 있다. 지금 우리의 헌정질서, 소위 ‘1987년 체제’가 도달한 종착점은 안타깝게도 민주주의의 도약이나 확장이 아니라 자멸이다. 눈부신 번영의 뒷그늘에는 각종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어쩌면 우리 모두를 실제적 혹은 정신적 죽음으로 몰아가는 크나큰 불의와 악덕이 도사리고 있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우리는 기필코 혼란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헌정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할 바는 오히려 그러한 표면적 정상성 아래 도사리고 있는, 실은 우리도 공범일지 모르는 억압과 차별, 무지와 위선, 폭력의 후예들과 결별하는 길이다. 현재 우리 사회 각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듯이 ‘탄핵을 넘어 평등세상으로’ 향하는 더딘 발걸음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가 취할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