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집착하고, 상반되거나 다른 입장을 가진 정보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려는 인지적 편향성을 말한다. 자신이 보고 싶거나 듣고 싶은 것에만 치중하며 자기만족적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 손쉽게 빠져드는 특징이 있다. 확증편향은 좌절이나 실패를 겪은 개인에게 자기위안을 주며 회복탄력성을 높여 주고, 조직이나 단체에서는 공통의 신념으로 결속을 강화할 수 있는 긍정성이 있다. 문제는 확증편향의 담론이 공동체의 어젠다를 다루는 공론장(公論場)으로 확장될 때 발생하는 적대적 태도와 소모적 갈등이다. 확증편향은 객관적 ‘사실’과 ‘진실’보다는 자신이나 집단의 신념과 주장을 추종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공존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국 사회 및 성격 심리학회’가 지난해 발표한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확증편향을 선정한 것은 시대적 위기감이 작동한 결과이다. 학회에 따르면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선택적 정보 취합,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 유튜브를 포함한 SNS 알고리즘 영향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확증편향이 개인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사회병리학적 대상으로 급부상한 것은 최근 우리 정치권이 보여준 적대적 진영논리와 협치정신 부재라는 부끄러운 정치행태 탓이 크다.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민주공화국 가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소통과 타협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 속에 제도화하는 과정에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와 정치권은 길을 잃었다. 상대방에 대한 혐오과 적대감을 동원한 과잉 확증편향은 시대적 유행이 되었고, 소통과 타협의 민주주의 가치는 진영논리에 기반한 SNS와 아스팔트 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민주주의 최종 보루인 정치권마저 여야 각자의 진영논리를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공격함으로써 권력을 추구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기형적인 정치생태계로 변질되고 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정치권의 과잉된 편가르기가 톱-다운(top-down)식으로 재생산되어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확산되고 있는 점이다. 동네에서 만나는 이웃들, 직장에서 부딪히는 동료들, 단톡방에서 친분을 나누는 친구들, 심지어 가족 사이에도 정치권에서 양산한 진영논리로 균열과 반목을 겪는 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는 확증편향 시대가 초래한 민주주의 위기의 절정판이다. 우리 국민은 그날 군대를 동원한 폭거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유신시대의 망령을 떠올렸다. 비상계엄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지도자 개인의 그릇된 확증편향이 낳은 국가적 범죄행위는 우리 사회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지우기 힘든 역사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우리 사회가 더 염려스럽다. 정치·경제적 이권을 추구하려는 모리배들과 일부 유튜버들의 확증편향 논리는 비상계엄 사태 이전보다 더 강하게 전사회적으로 파고들면서 우리 사회는 국론분열을 넘어 거의 심리적 유사내전 상태를 겪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응원봉을 든 20대 여성과 태극기를 흔드는 할아버지는 서로 껴안을 수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한 사회의 담론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새로운 권력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주장해온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의 자유롭고 이성적인 논의와 오류의 개연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시민문화가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말한다.
지금부터라도 사회적 공론화 차원에서 확증편향이 초래한 민주주의 위기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훼손된 민주주의 가치를 복원해 국민통합적 사회질서를 재정립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시인 허수경은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므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역설적 희망을 노래했다. 지금 우리는 확증편향 시대를 살아가므로 얼마나 지혜로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