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하며 걷기 시작한 겨울나무들이 소한(小寒)에서 대한(大寒)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새해 새 희망이 사라진 2025년 1월이 직립한 나무와 숲과 함께 겨울의 내부로 숨어듭니다. 간난(艱難)한 겨우살이는 점점 더 추워질 것 같습니다. 계절이 빈 손 빈 몸의 겨울나무에나, 동안거에 든 산사 수좌(首座)에게나, 저에게나 짙은 먹빛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다들 깨달음을 구하는 자세지만 이 시대는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강물이 강을 버려야 바다에 닿듯이, 일찍 자신의 잎을 모두 다 떠나보내고 침묵 선정(禪定)에 든 겨울나무는 세상이 보기 싫어 면벽한 산사의 수좌를 닮았습니다. 그래서 겨울나무의 색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침묵의 색깔입니다. 그 침묵의 무게가 제 마음 밑바닥까지 묵직하게 내려앉습니다. 말로써 찾아갈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침묵 안에, 나무가 가르쳐주는 피안(彼岸)이 웅크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무거워진 만큼 가벼워지는 깨달음 같은 답이 있을 것입니다만 오리무중의 미궁에 답답합니다.
나무와 잎의 작별은 해마다 되풀이됩니다. 저에게는 나무의 침묵이 해마다 더욱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때쯤 북쪽에서 불기 시작하는 된바람은 나무를 탄주하는 하늘의 차가운 손이 됩니다. 윙, 윙, 윙 나무가 울면 바람이 따라 웁니다. 마침내 큰 산이 대책 없이 우는 저녁이 오면 외로운 사람들은 나무를 찾아가는 바람이나 폭설이 됩니다. 첫눈이 오든가 첫얼음이 어는 시간과 함께, 1월이 깊어 갈 것입니다.
지역 출신의 아동문학가 동원 이원수(1911~1981) 선생의 명작 ‘겨울나무’를 조용조용 읊조려 봅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겨울나무를 관조한 4행의 이 동시는 저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불가의 진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아미타불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중생의 염원입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곧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불법을 설하는 부처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지만 죽어서는 극락에 가겠다는 가난하고 춥고 배고픈 민초의 꿈이 저 진언에 따뜻하게 담겨있습니다.
현실은 사람보다 나무가 극락 가기 쉬울 것입니다. 나무의 일생은 자신을 몽땅 다 내주는 거룩한 공양이지 않습니까. 배부른 사람이 오체투지로 닿을 수 없는 거룩한 부처의 시간을 찾아가는 수행을 나무는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말하라면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돌아가고 싶다는 범어(梵語)의 뜻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다는 ‘나무’는 ‘南無’(남무)라 쓰고 ‘나무’라 읽습니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56억7000만 년 뒤에 올 미래불인 미륵은 용화수나무 아래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성불은, 불가의 가르침이 나무와 연관이 있다고 저는 겨울나무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그대, 나무 아래 편안히 앉거나 나무와 같이 당당하게 서보길 권합니다. 나무가 읽어주는 시가 있어, 그 시를 두 귀로 듣는다면 나무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발이 없는 나무가 걸어가는 곳, 그곳이 아미타불의 나라일 수도 있고, 행복의 나라일 것이라 믿습니다.
나무에서 배워야 합니다. 나무는 위대한 인문 경전이며 철학 설법입니다. 나무가 가르침이라면 숲은 위대한 도량입니다. 나무에서 배우고 숲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나무와 함께한다면 누구든 새잎 피우는 희망찬 봄이 빠르게 찾아올 것입니다. 다 함께 나무의 노래를 듣고 나무의 노래를 부릅시다. 나무는 가르쳐주고 데려다줄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원하는 그 나라로.
동원 선생의 겨울나무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평생을 살아 봐도 늘 한자리/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꽃 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인생은 결국 한 자리지만 꽃 피고 열매 맺는 시간이 오면 이 시간이 매우 부끄러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