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귀가한 어느 주말 저녁. 든든한 식사 대신 에어프라이어에 통밀 베이글을 구워 먹었습니다. 살짝 갈색이 도는, 겉은 바삭했고 속은 촉촉했습니다. 크림치즈까지 발라 한입 베어 무니, 간편한 식사 이상의 ‘행복감’이 입안 가득 번지더군요. 며칠 뒤, 호기롭게 통밀 베이글과 치즈를 왕창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집에 잔뜩 쌓아놓고 나니 손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분명 다 먹고 싶어 사놓은 것들이었는데, 그 충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왜 그럴까. 그제야 ‘만족과 욕구는 결핍에서 온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결핍이 해소되면 어느새 욕구는 시들해지고요. 욕구가 시들해지면 만족감도 덩달아 옅어지게 되죠.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흔히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용하는 표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꼭 허망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멍 난 독에는 물이 결국 고이지 않으니, 부질없는 일처럼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결핍이 없었다면, 우리는 물을 부을 필요조차 못 느꼈을 겁니다. 독의 문제를 인지하고, 그 독을 채우기 위해 물을 부으려는 시도 자체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죠. 인간은 결핍이 있는 그대로 두기보다는, 그것을 채우거나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성취와 보람을 맛보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결핍은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완전한 안정이 아니다. 가치 있는 목표와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한 노력과 투쟁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를 경험하면서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극단적 결핍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 애쓰며 살아갈 의지를 마련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결핍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거죠. 때로는 결핍이 삶의 원동력이 돼, 우리를 다음 단계로 이끄는 동기로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프로이트도 ‘인간의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는데요. 궁핍한 현실이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일깨우는 것과 결을 같이합니다. 결핍을 없애는 것만이 해답이라면, 모든 인간은 끝없이 ‘소유’해야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앞서 베이글 예시에서 보듯, 결핍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히려 무관심이나 권태가 찾아옵니다. 채우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이죠.
물론 결핍과 공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결핍을 인정하라는 것은 신발 속 작은 돌멩이를 빼지 않고 등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장이라도 신발을 들어 털어내고 싶은데 말이죠. 그리고 옆에서 동정어린 눈빛으로 돌멩이를 빼라는 아우성도 함께 들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결핍을 맞닥뜨립니다. 매슬로의 ‘욕구 위계이론’과 같이 딱딱한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그러니까 결핍을 수용하는 것은 결코 낭만적으로만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전에 만난 부경대 사회복지학과 오영삼 교수는 이렇게 강조하더군요. “호르메시스를 기억하라.” 호르메시스는 유해한 물질도 ‘적정 수준의 노출이라면 오히려 생체 기능을 자극해 긍정적 변화를 유도한다’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소량의 독성이 오히려 신체 면역 시스템을 활발히 가동하게 만들어, 방어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거죠. 강아지를 키운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오히려 면역력이 더 강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결국 결핍은 당장이라도 소금을 쳐서 내쫓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굳건하면서 담대하게 인내해야 하는 것도 아닌, 적정 수준의 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약이 쓴 것은 알지만, 결국 우리를 좋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삼키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통밀 베이글을 잔뜩 사놓고도 손이 가지 않았던 그 순간을 통해, 결핍을 다시 생각해 봤는데요. 지나치게 과대해석하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채움보다는 ‘채워가는 과정’에 방점을 두는 태도,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이자,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조금 모자란 듯한’ 삶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전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