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대학 다닐 무렵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기가 다가오면 강의 내용 정리가 잘된 친구들 노트를 복사해 열공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러기에 친구에게 노트 빌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간혹 내 노트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그 노트를 받아 복사하고, 또 누군가는 복사한 노트를 또 복사해서 같이 공부하곤 했다. 사법고시 준비할 때도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나름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논문을 빌려주기도 하고, 친구가 작성한 답안에 부족한 점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공부하곤 했다.
지금 돌아봐도 힘든 시기였지만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이런저런 일로 힘들어하면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독이기도 하고, 술 취한 친구와 자취방에서 같이 자고 다음날 쓰린 속을 해장국으로 달래곤 했다. 공부할 당시에는 친구가 경쟁 상대라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무렵 내 노트를 빌려 공부한 친구가 더 좋은 학점을 받는다는 것이 나에게 실패로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학점이 상대평가였기에 다른 친구가 더 좋은 학점을 받으면 내가 낮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학점이 인생의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험은 친구와의 경쟁이 아니라 나와의 경쟁이었다.
예전에 젊은 변호사들과 식사하던 중 시험 때 노트나 교재를 빌려 주는 이야기를 하니, 로스쿨 학생들이 책이나 노트를 빌려주는 것이 쉽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로스쿨 중간고사, 기말고사 성적이 나중 법원이나 법무법인 등 취업에 절대적 영향을 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고등학교부터 대학, 로스쿨까지 무려 10년 이상을 ‘친구’보다는 ‘경쟁 상대’인 동료들과 기나긴 경쟁을 견디어야 한다는 것인데, 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실패를 경험해 보고, 친구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친구와 공동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서 치는 중간고사, 기말고사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시험마다 쫓기며, 선행학습으로 번 아웃(burn out·심신이 지친 상태) 될 지경인데, 이렇게 오랜 기간 경쟁의 시간을 거쳐온 로스쿨 학생에게까지 또 그런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가혹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부통령으로 지명되었던 팀 월즈는 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시골에서 태어난 본인의 유년 시절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하며 “전교생 숫자는 24명밖에 안 됐고, 아무도 예일대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웃처럼 살갑게 챙기는 법을 배웠다”는 연설을 했는데, 우리는 이렇게 친구를 살갑게 챙기는 학교 생활이 가능할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필자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후배 변호사를 보면서, 내가 변호하는 의뢰인들을 보면서 종종 느끼는 감정은 우리사회가 패자부활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한번 학교 시험을 망치면 내신점수 때문에 심대한 타격을 받고, 대학생도 학점이 안 좋으면 취업도 쉽지 않고, 가고 싶은 로스쿨도 갈 수 없고, 로스쿨 학생도 학교 시험 못 치면 학점 때문에 진로에 지장이 생겨버리는 실정이다.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가 패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패장을 처형했던 카르타고 등과 달리 패장에게도 설욕의 기회를 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했다. 아버지 스키피오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 있지만 로마 시민은 다시 군사를 주어 전쟁을 치르게 했고, 이후 아들 스키피오는 결국 카르타고를 격파하고 로마의 패권시대를 열게 했다는 것이다.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TV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해 “지금 겪고 있는 시행착오가 불필요한 과정이 아니라 굉장히 멋진 곳에 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일 수 있다”고 하며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응원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대입시험 발표일을 맞으며, 시행착오를 겪어 과거 점수가 좋지 않은 중·고등학생, 나아가 대학생들이 다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교육제도가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