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동구에서 ‘자주 개항 620주년 기념’이란 제호 아래 ‘부산포 가치 재조명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자주 개항’이란 말과 ‘620주년’이란 숫자가 무척이나 생경하다. 세미나는 부산포(부산항 초기 명칭)의 시작점이 1876년에서 470년을 거슬러 올라간 1407년(태종 7년)이었음을 공유하고, 관련된 가치를 공감하는 자리였다. 그날 이야기를 담아본다.
부산포란 지명은 14세기 말부터 15세기에 저술되거나 제작된 각종 서지류에 ‘富(부자 부)山浦’와 ‘釜(가마 부)山浦’로 달리 사용되며 그 유래에 대해 설왕설래했다. 그런데 태종 2년(1402) 김사형, 이무, 이회, 권근에 의해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之圖, 이하 혼일강리도)’에 釜山浦(부산포)란 지명이 정확히 명기되어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혼일강리도가 부산포를 釜山浦로 명기하고 지리적 여건을 보여준 최초 지도인 셈이다. 아프리카와 인도의 위치는 물론 각국 수도들이 표기되어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혼일강리도에서의 釜山浦 표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겠다.
부산포는 내이포(진해항)와 함께 이포개항이란 이름으로 1407년 7월 27일 국제사회에 문을 열었다. 왜만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조선 정부가 자주성을 가지고 항구를 연 날임에 분명하다. 16세기 들어 날로 포악해져 가던 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이순신 장군이 진두지휘한 부산포해전의 승리로 부산포 일대의 공간구조는 크게 바뀐다. 가장 큰 변화는 내륙 고지대에 자리했던 부산진성이 부산포 바로 옆에 수축되어 부산포와 부산진성이 긴밀한 상호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고, 그 일이 시작된 해가 1607년이었다. 그해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조선통신사의 왕래 역사가 부산포에서 펼쳐졌다. 1614년 경상순찰사 권반이 조영하고 1624년 선위사 이민구가 이름 지은 영가대에서 조선통신사가 용신제를 올린 후 대마도로 출항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통신사의 시간이 마감된 19세기 중후반 이후의 부산포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사보담 선교사(미국 북장로교)가 찍은 사진들 속에서 포구에 연이어 있던 부산장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130명에 이르렀던 호주 선교사의 활동과 흔적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다. 20세기 초 일제는 부산포를 관통하는 경부선 철로를 개설했고, 이후 부산포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고 만다. 부산진 1차매립공사(1913~1917)를 통해 부산포는 매립되었고,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2000년대 들어 영가대 복원, 조선통신사역사관 건립, 영가대기념비 일대 공원화 등이 추진되었고, 근자에는 부산진성의 이름을 되찾는 등 일제에 의해 왜곡되거나 잊혔던 부산포와 관련된 기억의 퍼즐 맞추기가 전개되기도 했다.
부산포가 처음 열렸던 무렵은 조선 태종 재위 기간이었다. 이미 아프리카와 유럽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혼일강리도에 수배이상 크게 표현된 조선 등의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민족적 자존감이 매우 큰 시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시대에 부산포를 열었으니, 그 의도가 단순히 왜만을 위한 것으로 보기엔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부산포는 1407년 이래 19세기까지 조선 외교의 첨단지대였고 조선 국방의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
부산포의 최활성기, 즉 하이라이트는 언제였을까? 조선통신사들이 12차례 오갔던 200여 년의 시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본다. 통신사 일행(300~500명)이 매번 출항 전 약 1개월 간 머물렀던 부산포 일대(동래 포함)는 무척이나 시끌벅적했을 것 같다. 숙박시설들과 주막들은 물론, 6척의 통신사선을 수리하고 또 건조하는 일로 기술자들이 몰려들어 성황이었을 것이고, 동행할 100여 명의 지원인력 모집과 각종 식료품의 수급으로 부산포 일대는 많은 사람으로 붐볐을 것이다. 무사 귀항한 항해기술자들은 일취월장한 기술로 바다를 누비며 전보다 높은 어획고를 올렸을 것이고, 교류 물품들의 거래로 부산장은 분주했을 것이다. 또한 평균 15년마다 반복된 일이었으니 통역 능력을 함양하며 통신사 일행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 뿐일까. 부산포 일대는 임진왜란 최초 전투지이자 순국한 정발 장군을 모신 정공단이 있는 곳이며, 부산포해전의 승전지였다. 이와 함께 조선통신사의 출·귀항장이자, 동래읍성과 부산진성의 외항이자 부산장과 함께 번성했던 포구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부산지역 3·1만세 운동의 최초 발생지였고, 호주선교사들을 품었던 곳이기도 했다. 또한 독도가 조선 땅임을 알린 안용복과 독립투사 박재혁 열사와 최천택 선생의 생가(터)도 이곳에 자리한다.
부산포를 기억해야 한다. 부산포를 관통했던 자주 웅비 호혜의 정신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녹슬고 변색된 기억들과 무뎌진 마음을 다시 올바르게 잡아야 한다. 부산포는 조선과 대한민국에 있어 글로컬(글로벌과 로컬)을 지향했던 최고의 현장이었다. 그 기억들을 다시 찾아 쌓아가야 함은 후대가 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고 부산이 나아가야 할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