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반복되는 일상의 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멍에로 느껴진다. 여름이면 그 기나긴 낮을 어떻게 보내야 하며, 겨울이면 긴긴밤을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늘 하던 일의 반복이다. 무거운 바윗돌을 정상까지 힘겹게 밀어 올리면 다시 아래로 간단없이 굴러떨어지고 마는 무한 반복의 삶을 목숨 다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불가항력의 죄업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막막할 때가 있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속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무한한 기다림을 생각한다. 두 사내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황량한 사막 속의 낮과 밤을 보낸다. 에스트라공이 안간힘 쓰며 구두를 벗는 행위는 존재의 멍에를 벗으려는 무모한 행위이고,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는, 존재의 불안에 대한 황폐한 삶의 은유적 상징인지도 모른다.
두 사내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무한 반복의 삶을 견디는 시간의 덫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향해 욕을 해대거나, 그것조차 무위로 끝나면 나뭇가지에 목매달아 자살하고픈 충동까지 느끼며 시간의 잔인함에 진저리 친다. 그래도 기다리던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인 짐 자무시 감독의 작품 ‘패터슨’(2017)이라는 영화가 그 대안으로 떠오른다. 이 영화는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에 살고있는 ‘패터슨’이라는 버스 운전기사의 반복적인 삶을 다루고 있어, 어떻게 보면 그의 삶 역시 이와 다를 바 없이 반복의 형벌일 수 있다.
아침 6시 10분이면 잠자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콘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 출근해 버스를 운전한다. 그는 버스 승객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시상을 떠올리거나, 점심 무렵에는 폭포수 근처 쉼터에서 샌드위치를 먹은 뒤 노트에 시를 쓴다. 퇴근하면 아내와 저녁을 먹고, 반려견 ‘마빈’을 산책시키며 근처 단골 바에서 맥주를 마신 뒤 돌아와 잠을 청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패터슨의 삶 역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같은 무한 반복의 지겨운 일상과 큰 다름이 없다.
그러나 패터슨의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일상에는 하나의 변주가 있다. 그는 틈틈이 시를 쓰면서 지루한 일상을 벗어난다. 그에게 시 쓰기는 하나의 변주이다. 마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무한 반복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든 포조와 럭키처럼 삶의 균열과 같다. 어느 날 패터슨의 변주에도 느닷없는 변곡점이 파란을 일으킨다. 반려견 마빈이 시가 적힌 그의 노트를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어느 날 패터슨에게도 반복의 무위한 행위를 구원하는 희망이 도래한다. 쉼터에서 쉬고 있는 패터슨에게 일본의 시인이 다가와 새로운 노트를 건네주며 “때론 텅 빈 페이지가 무한한 가능성을 선사할 때가 있죠”라며 희망을 불어넣는다. 패터슨은 지하에 가두어 놓았던 반려견 마빈을 용서하고 새로운 시 쓰기의 희망을 품는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2막 끝에서 소년이 고도가 안 온다고 전해도, 다시 무한 반복의 무위한 일상을 떨치며 오지 않는 희망을 찾아 길을 나서듯이….
‘패터슨’의 패터슨이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사내처럼 무한 반복의 삶에도 변주는 있을 수 있듯, 우리의 삶에도 희망으로 은유 되는 청신한 변주가 있을 것이다. 패터슨이 시 쓰기를 다시 시작하듯,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오지 않는 고도를 찾아 새로운 길을 떠나듯, 반복을 무력화시킬 청신한 변주에 대한 가능성은 분명 있다. 패터슨은 버스 기사였지만 버스 안에서 매번 다른 풍경을 만나고, 출퇴근길에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단조로운 일상적 풍경을 변주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하릴없는 풍경이지만, 매번 오지 않는 고도를 찾아 다시 변주의 길을 떠난다.
시간의 형벌을 떨쳐버릴 일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없는 일도 만들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될 일이다. 물리적 시간보다는 심리적인 시간의 변주가 추동력이 되어야 한다. 반복이 아니라 변주인 라벨의 음악 ‘볼레로’가 그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