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시인 엘리엇은 노래했다. 그 사월은 1차대전의 폐허라는 시대적 참화를 배경으로 그려졌다. 우리의 사월도 잔인한 계절이다. 이전 사월은 제주 4·3의 비극으로 기억된다. 1947년부터 무려 7년여에 걸친 그 사건은 수만 명의 민간인 학살을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 속에 묻어온 참혹한 역사였다. 지금 사월은 세월호의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다. 올해로 10주기인 그 참사는 아직 기억의 이름으로 묻기에도 무거운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유족들의 치유도,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이루어지지 못한 여전한 상처이자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월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런 역사적 아픔을 딛고 힘겹게 일구어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지금 안녕한지. 나라 밖에서 들려온 경고가 오히려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난달 세계적 권위의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발표한 ‘2024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한국의 순위는 47위를 기록했다. 앞선 28위에서 20계단 가까이 급락했다. 게다가 ‘민주화에서 독재화로의 전환이 진행 중인 42개 나라’에 포함되었을뿐더러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는 일이 단지 가혹한 독재 국가만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었다. 세계가 주목했던 한국형 민주주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사월은 그렇게 우리 현실의 잔인함을 비추는 시간이다.
하지만 사월이 오롯이 숨 죽은 시간은 아니었다. 우선 지난 세계사에서 사월은 68혁명의 절정을 예비하는 시간이었다. 1968년 4월,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 마틴 루터킹 목사가 암살되며 전국이 폭동으로 뒤덮이고 서독은 68혁명의 아이콘 루디 두치케가 극우 청년의 총에 맞으며 바리케이드를 앞세운 ‘부활절 봉기’가 발발한다. 프랑스에서는 권위적 정치와 대학 안팎의 모순에 맞선 젊은이들의 분노가 1000만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하는 ‘5월혁명’을 위한 저항의 에너지를 비축한다. 68의 저항은 유럽과 미국을 넘어 남미와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세계혁명’의 지도를 구축한다. 그렇게 68혁명은 세계를 뒤흔들며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새로운 시대를 노래하는 격변으로 기록되었다.
우리도 그런 사월이 있었다. 1960년 4·19는 쿠바혁명과 더불어, 68혁명으로 정점을 찍는 격동의 지구촌 60년대를 열어젖힌 놀라운 혁명이다. 한국전쟁 후 10년도 되지 않아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분노가 독재의 억압을 뚫어낸 세계사적 사건이다. 이후 박정희 군사쿠데타와 유신 독재의 폭압도 결국 부마항쟁으로 종언으로 치닫고, 광주민주화운동을 학살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 역시 6월항쟁의 위대한 저항으로 돌파된다. 그렇게 우리 역사의 사월은 빛나는 항쟁의 되풀이 속에서 21세기 촛불혁명의 염원으로 이어지고, 놀라운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더불어 일군 대한민국 역사는 세계사의 유례없는 성취로 기록되었다. 이렇듯 역사 속 사월은 끊기지 않는 희망의 오월과 봄을 노래하는 시간이었다.
얼마 전 우리는 총선의 사월을 보냈다. 결과는 예견된 측면이 컸다. 들끓는 민심은 이미 여당의 참패를 예정하고 있었다. 어떤 편에는 잔인할 수도, 어떤 쪽에는 기쁠 수도 있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표심이 변화를 요구하고 명령하는 것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민생’을 외치지만 민생은 없는 정치, ‘평화’를 말하지만 위기를 향하는 외교를 비롯한 대내외적인 정책과 정치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불안을 넘어서 정치와 정권에 대한 거대한 불만과 분노의 목소리였다.
이제 어떤 오월을 맞이할 것인가. 그 사월에서 배우고 새로운 변화를 위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금 변화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것인가. 역사는 분명히 말한다. 정치권력자들이 퇴행과 탄압을 고집할 때 어떤 변혁이 준비되는지를. 4·19에서 촛불 시민혁명으로 비상한 저 도저한 역사가 선연히 증거하듯.
시인 엘리엇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사월은 희망의 오월을 낳는 계절인 까닭이다. 희망 없는 시대에 역사는 언제나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통해 희망을 불러왔다. 희망 없음이야말로 절망을 거부할 가장 큰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