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감성터치] 막장이라는 이름 앞에

김정화 문학평론가·수필가

  • 김정화 문학평론가·수필가
  •  |   입력 : 2023-12-17 19:31:33
  •  |   본지 22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우거진 잡목 사이로 낮은 가옥들이 보인다. 머리 위로 고가다리가 놓였고, 산자락에는 소담한 논밭이 늘어졌다. 굽은 실개천이 내림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 달음산 고개가 있어서인지 드문드문 등산객이 산길로 향한다.

지옥마을이라 불렸던 비운의 땅, 강제징용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은 오지 마을의 옛집들이 그대로다. 일명 눈썹처마를 단 주택들이 산언덕 가장자리와 비탈진 땅에 다랑논처럼 다닥다닥 내려앉았다. 의도적으로 서열을 배치한 듯 일본인 고위직의 적산가옥이 가장 높은 곳에 지어졌고 그들 간부 사택 아래로 한국 노역자들의 살림집은 더 낮게 더 작게 담을 붙여 놓았다. 한때 100여 가구가 빽빽이 거주하며 번성했던 적도 있다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골목길 공터 한쪽 평상에 호호백발의 할머니 서너 분이 모여 있다. 모두 광부의 미망인이라 했다. 옛일을 물었으나 가물가물한 기억에 애매한 답만 오간다. 남은 마흔여 명의 주민은 대부분 외지에서 들어왔거나 광복 이후부터 거주했기에 슬픈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물다. 오히려 광산의 전성기를 경험한 광부 부인들은 돈벌이가 잘되었던 시절을 기억하며 이곳을 황금의 땅으로 인식한다.

누가 광부가 되는가. 식민통치 때는 억울하게 갱도로 끌려갔으나, 세상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이 스스로 광부가 되기도 했었다. 땅 위 세상에서 더는 희망이 없을 때, 독기를 품고 시커먼 굴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순식간에 생사가 갈라지는 사투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 그래서 광부들이 일하는 곳을 막장이라고 부른다. 갱도의 맨 끝,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벽, 인생의 절망보다도 더 캄캄한 세상, 긴장을 놓쳐버리면 목숨줄이 끊어지는 곳. 그러니 광산촌 사람들에게 금기어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오기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곳도 막장이다. 누군들 막장까지 내려갔던 삶이 없었을까. 내가 아는 박 부장도 딱 3년간 광부로 살았다. 하던 사업이 무너졌고 집은 일찌감치 은행으로 넘어갔다. 네댓 직원들의 밀린 임금과 퇴직금이 발목을 잡았다. 전세금을 찾았고 부인의 반지를 빼냈으며 두 딸의 피아노가 트럭에 실려 나갔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진짜 막장이었다. 그는 검은 바닥에서 검은 울음을 토하며 견뎌내었고 기약했던 광부 생활을 마치고 목숨 같은 임금을 쥐고서 당당히 가족을 상봉했다. 지옥도(地獄道) 속에서 채탄 광부로 일한 그 종잣돈으로 지금 그는 아내와 함께 조그만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창작의 고통을 안은 산실을 두고도 작가들은 저마다의 은유로써 이름을 붙여왔다.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서재를 막장이란 말로 표현했다. 어찌 가만히 책상에 앉아 글 쓰는 일을 가지고 목숨이 달린 갱도의 막장과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막장의 굴을 파듯 생사를 걸고 한 땀 한 땀 글 삽을 파는 글쟁이도 존재하는 것이다. 의지를 갖고 곡괭이를 들 수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딘들 막장 아닌 곳이 있으랴.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지는 즈음, 광부 미망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콩나물 국수를 한솥 삶아왔다. 훈훈해지는 인정에 노인들은 저세상으로 떠난 광부 남편 이야기도 웃으며 한다. 바깥양반이 10킬로미터까지 내려가서 지고 온 광석을 물에 걸러 서울 제련소로 보냈다고도 하고, 저 아랫골 광부는 굴속에 빠져 죽었다는데, 그 양반만 죽은 것이 아니고 셀 수도 없었다며 목소리를 낮춘다. 그래도 그 굴 막장이 밥줄이 되어주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후루룩 국수를 삼킨다.

멀리 광부들이 다니던 길을 올려다본다. 살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리던 고행의 길. 그 길에도 계절마다 꽃이 핀다. 어디 흙 위에서 피는 꽃만 꽃이던가. 녹물 붉던 실개천도 이제 허연 물꽃이 흐르고, 달음산 능선 위로는 노을 꽃이 물들며, 손 흔들어주는 늙은 광부 아내의 머리에는 서리꽃이 피었다. 막장까지 무너졌던 한 여자의 옛 기억도 스멀스멀 골바람 따라 이지러진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오늘이슈

 많이 본 뉴스RSS

  1. 1[도청도설] if, 손아섭
  2. 2전국 언론인 청와대 앞 집결…“국제신문 대주주 엄벌” 촉구
  3. 3[포토에세이] 가을의 꽃 코스모스
  4. 4부산에 엔비디아 전용 생산라인 선다(종합)
  5. 5부산 재정자립도 1위 강서구, 생활임금 도입 나홀로 거부
  6. 6북극항로 개척자 “유빙·극한환경서 새 희망 봤다”
  7. 7되돌아와 수로 출구 앞에서 맴도는 부캉이
  8. 8공공 건설현장인데…추락 안전망 없고 감독 태만 부지기수
  9. 9[속보] 국정원 "김정은 사망설 허위" 국회 정보위에 보고
  10. 10부캉이 머물던 북항서 기름 유출…8시간째 모습 안 보여
  1. 1[속보] 국정원 "김정은 사망설 허위" 국회 정보위에 보고
  2. 2北 “국경선 확성기 외 새 대응수단 대기” 연일 대남 협박(종합)
  3. 3가덕 공사비 증액 ‘강제’ 아닌 ‘권고’…법개정 정부 초안 논란
  4. 4이 대통령, 최길수 특별감찰관 임명
  5. 5李대통령 지지율 소폭 상승해 40% 회복…부정평가는 50%
  6. 6최길수 특별감찰관 청문보고서 채택
  7. 7공소청 첫 국감 ‘李 공소 취소’ 공방…檢 총장 대행 “검토·지시 한 바 없어”
  8. 8‘남북 MDL 상호확인·군통신선 복원’ 정부, 군사회담 北에 제안
  9. 9김민석, 소방노조 만나 “정책·예산으로 안전·처우 개선” 약속
  10. 10금융위원장 "산은 부산 이전 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 파장
  1. 1부산에 엔비디아 전용 생산라인 선다(종합)
  2. 2북극항로 개척자 “유빙·극한환경서 새 희망 봤다”
  3. 3로그인 없이 서버장악 가능…전 세계 ‘PHP’ 보안 비상
  4. 4부산시대 연 HMM, 올해만 6조원 투자
  5. 5서낙동강 수변입지에 4Bay 구조…실속 갖춘 59㎡ 단일평형 차별화
  6. 6[한 손 뉴스] 낙상·실종 막는 ‘스마트신발’…부산TP, 노약자 지원 확대
  7. 7부산 온 인도 구자라트주 대표단, 지역기업과 조선·금융 협력 모색
  8. 8부산건설사·대기업, 상생협력 머리 맞댄다
  9. 9한은 기준금리 3% 동결…긴축 유지, 속도조절 속 내달 다시 인상 가능성(종합)
  10. 10한전, 개인정보 유출 1만1000명 추가 “조사 과정서 발견”
  1. 1전국 언론인 청와대 앞 집결…“국제신문 대주주 엄벌” 촉구
  2. 2부산 재정자립도 1위 강서구, 생활임금 도입 나홀로 거부
  3. 3되돌아와 수로 출구 앞에서 맴도는 부캉이
  4. 4공공 건설현장인데…추락 안전망 없고 감독 태만 부지기수
  5. 5부캉이 머물던 북항서 기름 유출…8시간째 모습 안 보여
  6. 6[속보] 여전히 수로 주변 배회하는 ‘부캉이’…“환경 적응하면 바다로 간다”
  7. 7“거제 양대 조선소와 상생 협의…남부내륙철도에 행정력 집중”
  8. 8[속보] '명태균 여론조사비 대납 의혹' 오세훈 2심 무죄
  9. 9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23일
  10. 10부산교통공사 노사, 파업 직전 잠정 합의…도시철도 정상 운행
  1. 1종합 6위 부산, 고른 활약에도 아쉬움
  2. 2만년 꼴찌 삼성 선두 ‘파란’…前 챔프 KCC 최하위 ‘수모’
  3. 3쇼트트랙 전설 최민정의 마지막 질주
  4. 4‘성폭행 의혹 제기’ 초교후배…기성용에 1억 배상해야
  5. 5‘높이’ 키운 BNK썸, 2년 전 영광 재현 노린다
  6. 6호랑이 발톱 세운 김도영…돌아온 사자 포효 최형우
  7. 7축구협회장 선거, 12월 18일 추진
  8. 8요트 하지민, 레이저급 정상…전국체전 16연패 역사 쓰다
  9. 9부산시설공단 여자핸드볼팀 전국체전 2년 연속 금메달
  10. 10마무리 캠프 코앞인데…롯데 감독·단장 인선 언제쯤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진짜 질문의 시작
AI 시대, 부산 R&D의 대전환
국제칼럼 [전체보기]
원칙이 흔들린 대가
‘빵과 책’·양자경·강말금 그리고
기고 [전체보기]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의 과제
배의 피부를 지키는 기술은 도장이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AX·반도체 전시회 5개 동시에 열렸는데…
북극항로, 첫 배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배다
도청도설 [전체보기]
if, 손아섭
교육이라는 희망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25년을 간직한 리플렛 세 장
요추부 척추관협착증, ‘메포츠’로 극복하기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기초의회 의정비 증액, 합리적 기준이 필요하다
특별감찰관 부활, 임명보다 실질적 감찰이 중요하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이불 킥’의 순간에 도움 될 심리학 지식 한 스푼
문화예술의 시대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대규모 대미 투자, 기회인가 위협인가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사람은 갔어도 명당은 남아 있다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청년 떠나는 지방, 수도권 인구 분산해야
거울 속의 외계인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