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수도 부산이란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해가 2016년이었으니, 햇수로 7년이 지나간다. 필자에게 있어 지난 7년은 부산이란 도시에 내재된 특별함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1950년에 부산이 없었다면” “그해 8월과 9월에 부산항이 없었다면”이라는 상상 아닌 상상은 대한민국에 있어 부산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
근자에 향토사학자 김한근 선생에 의해 1950년 8월 5일에 촬영된 여러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발굴됐다. 2부두에 짐을 푼 미 해병들이 1부두 쪽으로 행진하다가 부산역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아마 그들은 왜관, 다부동, 안강과 기계, 영천 등지로 이동해 전투에 참전하고 낙동강 전선 구축에 힘을 보탰으리라. 국군과 함께 그들은 낙동강을 지켜냈던 대한민국 수호의 주역이었으리라. 그해 8월 18일,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는 시작됐고 9월 14일까지의 버팀은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그 시간은 전쟁 역전이라는 씨앗을 품었고 결국 싹을 움트게 했다. 그러나 그대로 끝날 줄 알았던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는 이듬해 1·4후퇴와 함께 재개됐다. 길어지는 전쟁으로 사상자들이 수없이 쏟아졌고, 당시 부산은 전쟁 중이었음에도 전쟁이 없었던 유일한 대도시이자 피란수도였기에, 유엔군의 안치를 위한 터도 부산에 선택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이 피란수도로서 1023일 동안의 임무를 마친 지 정확히 70년이 흘렀다. 지금 부산은 건축물 5개소와 장소 4개소로 구성된 피란수도 부산의 흔적들을 모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생뚱맞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겪지 않은 대다수가 시민이 된 이제야 피란수도의 흔적을 세계유산과 연결하려는 의도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세계유산을 가져 보겠다는 과욕(?)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부산의 정체성, 대한민국에 있어 부산 역할론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논지는 분명 옳아 보이는데, 등재하겠다는 유산들의 실태가 무척 딱하고 상황이 어려운 점이다. 우리나라의 세계유산 모두는 사적급 이상으로 보호받아 온 것들이다. 오래전부터 온전히 지켜온 유산이었기에 세계무대서도 통한 것이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부산은 1970년대까지 전쟁 후유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떠나지 못했던 육칠십만의 피란민은 부산사람이 됐고, 결과적으로 부산은 수용력의 서너 배를 초과하는 초고밀 도시가 됐다. 그래서 부산은 생존을 위해 다투는, 마치 용광로와 같이 끓어오르는 개발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3인이 살면 적당한 집에 이미 4명이 살고 있었고, 이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 많은 사람이 한 집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집이 제대로 유지될까. 분명 이삼일 내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부산이 바로 그런 도시였다. 다르게 생각하면 부산은 국난을 떠안은 고난의 도시였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면, 비로소 부산의 현재 모습이, 특히 피란수도 부산과 연결된 유산들의 상태가 이해되고 또한 제대로 유산을 지킬 수 없었던 지난 현실에 가슴이 저려온다. “어쩔 수가 없었구나.” “참으로 힘들었겠구나.”
7년 전 상황을 회상해본다. 부산연구원 부산학센터의 발의로 기능을 잃은 채 급속도로 사라지고 기억마저도 희미해져 가던 피란수도 부산의 물증들을 찾기로 했다. 1000여 개에서 280여 개로 다시 16개로 그리고 지금의 9개로 좁혀졌다. 옥석이라고 골랐지만, 그마저도 반수 이상은 문화재는커녕, 그저 오래되고 낡아 하찮게 여기던 것들이었다.
많이 늦었지만, 시는 문화재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을 밟고 등급도 올려보았다. 그러나 대부분 도심 속에 위치해 추가적인 보호조치가 만만치 않고, 아직도 국가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그렇다고 포기는 있을 수 없다.
과거 사실을 뜻하는 역사(歷史)에서의 史는 ‘中’과 바른손(오른손)인 ‘右’가 결합돼 ‘바르게 쓴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과거 사실에 대한 ‘올바르고 진실된 주관적 설명과 해석’을 더한 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이에 한 가지를 보태 본다. 잊고 있었거나 놓치고 있어 몰랐던 것을 바르게 알게 하는 것도 역사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부산은 과밀해 보이는 겉모습과 경제발전 중심의 정책 때문에 늘 개발도시로 치부돼왔다. 그러나 부산은 조선시대부터 끊임없이 반복된 왜의 침략과 19세기 중후반부터는 일제 침략을 버텨낸 국토수호의 보루였고, 연이은 전쟁과 백만 이상의 피란민을 품었던 포용의 도시였다. 특히 1023일 동안, 그리고 이후 20여 년간 부산이 보낸 시간은 대한민국의 존립을 결정짓고 확증했던 위대한 역사였다. 이 역사를 보다 더 바르게 기록해야 함은 물론, 더 적극적으로 절실히 기억하며 더불어 살아가면 좋겠다. 왜냐하면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를 지켜가는 일은 결국 대한민국의 근대역사를 올바르게 세워가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강동진 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