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본명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이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6세. 그는 영국 역사상 최장 기록이자, 유일한 재위 70년 군주다. 지난해 사망한 남편 필립공과는 20세인 1947년 결혼했다. 그는 애초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1936년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는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평민 출신과의 스캔들로 왕위를 포기했다. 아버지 조지 6세가 2차 대전 후 병환으로 사망하자 1953년 여왕으로 즉위했다. 여왕은 대관식을 치른 뒤 바로 6개월간 영연방 순방에 나서 결속을 다졌다. 호주 뉴질랜드는 영국 왕으로서 첫 방문이었고 인도도 50년 만에 찾았다.
그는 ‘살아있는 현대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재임 기간 윈스턴 처칠부터 현재 리즈 트러스까지 총 15명의 총리와 함께 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격동기에 영국민을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여왕은 매주 화요일 총리를 만나 현안에 대해 보고 받으면서도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여왕은 외교무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까지 미국 대통령 14명 중 13명을 만났고 세계 100여 개국을 방문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가 만난 한국 대통령만 6명(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이다.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여왕이 충효당에서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화제가 됐다. 소탈한 면모를 보여준 그는 충효당 마당에 구상나무를 심었다. 여왕이 다녀간 이후 하회마을은 매년 관광객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며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여왕은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찰스 3세와 고 다이애나비의 이혼, 차남 앤드루 왕자의 성추문 등 가족사로 어려움을 겪었다. 오는 19일 치러지는 장례식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바이든 미 대통령, 나루히토 일왕 등이 조문할 예정이다. 여왕 서거에 따라 지난 10일 왕위를 계승한 찰스 3세가 영국 국왕이 됐다. 영국은 지금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이어 보리스 존슨 총리 낙마로 인한 새 총리 임명, 여왕 서거 등 한꺼번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어려운 시기에 국민을 다독이고 위기를 돌파하던 리더십이 절실한데 찰스 3세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많다. “여왕 서거가 런던브리지가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는 미 뉴욕타임스 보도가 과장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이은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