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로 기어 왔다가, 두 발로 걸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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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족관에서 갓 건져 올린 말미잘. 형광색 낚싯줄을 물고 있다. |
부산 기장군 어느 음식점 벽에서 발견한 문구다. 숙취에 시달리다 해장으로 구원받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술꾼이라면 격하게 공감할만한 말이다. 네 발로 기어 오다시피 한 고객을 두 발로 당당하게 걸어 나갈 수 있도록 기력을 회복시켜 준 음식은 다름 아닌 말미잘탕이다.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오로지 기장군의 몇몇 음식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별미다. 나는 이 문구를 발견한 이후로 기장을 찾는 지인이나 관광객에게 말미잘탕을 꼭 추천한다.
그럼 말미잘탕이 숙취 해소에 정말 그렇게 효과가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말미잘의 영양성분이나 효능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는 아직 없다. 국내에서 말미잘에 대한 유일한 과학적 접근 사례는 지난 2018년 포스텍에서 홍합과 말미잘의 단백질을 활용해 상처 부위의 혈액을 응고시키는 지혈 소재를 개발한 사례가 유일하다. 말미잘 따위를 먹겠다고 생각한 전례가 없으니 말미잘의 영양성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턱이 없다.
기장군에서 말미잘을 먹기 시작한 것은 30년 남짓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붕장어를 잡을 때 말미잘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기장군의 명물인 붕장어는 통발과 주낙 두 가지 방식으로 잡는다. 통발은 미끼를 넣은 통발에 붕장어를 가두는 방식이고, 주낙은 하나의 긴 줄에 미끼를 끼운 바늘이 달린 수백 개의 낚싯줄을 던져서 붕장어를 낚는 방식이다. 말미잘은 바로 이 주낙에 달린 미끼를 물려다 몸통에 낚시 바늘이 걸리면서 올라온다. 괴상하게 생겨 잡자마자 그냥 버렸는데 양이 만만찮았다. 처음에는 물메기탕을 끓일 때 손질한 말미잘을 썰어 넣어봤다. 물메기의 물컹물컹한 식감과 말미잘의 꼬들꼬들한 식감이 잘 어울렸다. 내친김에 보양식으로 업그레이드했다. 붕장어와 말미잘을 뭉텅뭉텅 썰고 된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하고 방아잎을 듬뿍 올려 매운탕처럼 끓였다. 맛의 골격은 대부분 붕장어가 잡아준다. 그래서 붕장어가 주연인데 음식의 이름은 조연인 말미잘이 꿰찼다. 덕분에 기장을 대표하는 여름 보양식이 되었다.
기장의 횟집 수족관에서는 심심찮게 말미잘을 볼 수 있다. 수족관에 있을 때는 하늘거리는 촉수가 꽤 이쁘다. 그런데 대부분의 말미잘에 형광색 낚싯줄을 물고 있다. 붕장어 주낙에 딸려온 말미잘임을 증명하는 표식이다. 나는 말미잘이 품고 있는 낚싯줄이 꽤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말미잘을 먹기위해 일부러 잡으러 다닌다고 하면 처지가 너무 곤궁해 보인다. 하지만 붕장어를 잡으려다 딸려온 말미잘을 버리지 않고 음식으로 활용했다고 하면 지혜로 읽힌다. 말미잘이 품고 있는 낚싯줄은 가난함과 지혜를 가르는 일종의 경계선이다. 그리고 지혜롭고 억척스러운 기장 사람들은 같은 주낙에서 잡힌 붕장어와 말미잘을 활용해 근사한 여름 보양식을 탄생시켰다. 진정한 창조경제의 실현이다.
음식의 탄생 비화가 아주 거창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난히 무더운 2022년 여름, 기장에 가셔서 말미잘탕을 드시면 먼 훗날 기장을 대표하는 향토음식 서사의 목격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네 발로 기어가서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나오는 기적을 체험하시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