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억제냐, 경기침체 우려냐.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두 축인 연준과 월가가 인플레이션 탈출의 해법을 두고 충돌하고 있다. 연준은 미국의 6월 물가 상승률이 9%를 넘자 점보스텝의 금리인상과 양적축소에 나섰다. 이에 맞서 월가는 고금리가 몰고 올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를 한껏 띄우면서 연준의 인플레이션 대응전략을 집중 견제하고 있다.
연준과 월가는 태생적으로 추구하는 이해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이다. 무소불위의 정책금리 결정권과 달러 발행권을 쥔 연준은 적정수준의 금리와 양적공급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상황을 유지하는 게 목표다. 반면 자본이득을 추구하는 월가는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 공급을 통한 경제적 버블이 절실하다. 이런 상반된 이해관계 때문에 연준과 월가는 경제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양보 없는 일전을 벌여왔다.
역사적으로 월가의 탄생은 연준보다 한 세기 앞선다. 1817년 뉴욕증권거래소 설립과 함께 미국 금융의 심장으로 자리한 월가는 1971년 벤처기업 중심의 나스닥 시장이 출범하면서 세계의 금융시장으로 우뚝 섰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동성 자본의 60%가 월가에 집결되어 있다.
반면 연준은 월가보다 100년 늦은 1913년 출범했다. 금리 결정권과 달러 발행권을 쥔 연준이지만 설립 이후 반세기 넘도록 월가의 파워에 눌려 지냈다. 월가의 큰손인 JP모건과 자본가들이 1920년대 대공황 탈출의 원동력이 된 뉴딜정책의 자금을 대면서 미국 경제정책은 월가의 자본가들이 좌우했다. 지금까지 월가 출신 인사들이 행정부의 고위 경제 관료로 발탁되는 관례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연준은 달러가 기축통화로 정해진 브레튼우즈체제 출범으로 위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정치적 독립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 월가 출신이 장악한 미국 재무성의 그늘에 가려 ‘달러 제조공장’ 수준에 머물렀다. 월가 출신이 장악한 미국 재무부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대 연준 의장의 재임 기간을 보면 1970년대 말까지 월남전 비용을 위해 막대한 달러를 찍은 윌리엄 마틴을 빼면 4년 임기를 넘긴 인사는 거의 없다. 단명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연준을 재무부의 산하기관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연준과 월가의 불편한 동거는 1980년대 초에 깨졌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를 자임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월가의 거센 저항을 뿌리치고 단번에 금리를 4% 인상하는 울트라스텝을 밟은 때문이다. ‘토요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이 조치로 하루아침에 월가는 초토화됐다. ‘볼커의 반란’은 미국 제조업을 나락에 빠트렸지만 인플레이션을 잡고 달러화의 권위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연준이 월가의 파워를 압도하는 사건이었다.
연준과 월가의 대립은 1987년 앨런 그린스펀이 등장하면서 끝났다. 연준의 강공에 8년간 숨죽이고 있던 월가는 환호했다. 그린스펀은 10%를 넘던 금리를 절반 밑으로 낮춰 월가의 ‘골디락스 호황’을 뒷받침했다. 저금리로 풍부해진 자금이 미국 실리콘밸리로 몰려 벤처열풍이 불었다. 벤처기업 중심인 나스닥의 시가총액은 전통 제조업 기업이 상장된 뉴욕증시를 넘어설 정도로 급성장했다.
따져보면 현재 세계 경제를 강타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폭풍의 이면에는 월가의 과도한 탐욕이 숨겨져 있다. 월가 출신 관료들이 경기 활성화 명분을 내세워 연준에게 지속적인 저금리와 통화증발을 압박한 결과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월가의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었다. 당시 버냉키 연준 의장은 그린스펀이 18년간 퍼부은 유동성 잔치를 끝내려다 되레 금융위기의 철퇴를 맞고 결국 월가의 양적완화 요구에 굴복했다.
하지만 연준과 월가는 21세기 들어 처음 닥친 인플레이션의 해법을 두고 적대적 관계가 아닌 동지적 관계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인플레이션의 난관을 돌파하지 못하면 공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준과 월가는 30년간 지속된 저금리와 양적완화의 유동성 파티를 끝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하지만 문제는 금리인상과 양적축소의 범위와 방법이다. 연준과 월가의 인플레이션 탈출을 위한 해법의 선택에 세계 경제가 주목하는 배경이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