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파(Adapa)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현인이었다. 어느 날 그가 티그리스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데 세찬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혔다. 화가 난 아다파는 거센 남풍의 날개를 부러뜨렸는데 이 때문에 7일간 바람이 불지 않았다. 하늘의 신 아누(Anu)는 사태를 파악한 뒤 우주의 질서를 교란시킨 아다파에게 천상으로 올라와서 자신의 행동을 소명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아다파가 모시던 지혜의 신 에아(Ea)가 신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했다. 천상에서 아다파는 ‘생명의 음식과 음료’를 대접받았는데 에아의 조언에 따라 그것들을 먹고 마시지 않았다. 에아가 하늘의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신다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아누 앞에 섰다. 하늘신은 아다파에게 왜 제공된 음식과 음료를 거부했는지 물었다. 아다파는 에아의 조언에 따랐다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아누는 한바탕 웃더니 판결을 내렸다. 아다파의 행동 때문에 인간들은 질병으로 고통받을 것이라는 운명이 부여됐다.
성배의 전설에는 ‘어부 왕’(Fisher King)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술잔인 성배를 지키는 가문의 왕이었다. 마침내 ‘성배의 기사’ 파르치팔(Parzival)이 그의 성에 나타났다. 성안의 모든 사람은 파르치팔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환대를 했다. 그는 보석으로 장식한 칼과 칼집을 선물 받았으며 왕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에서는 갖가지 기묘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는데, 예컨대 어부 왕은 두꺼운 털옷을 껴입었는데도 덜덜 떨고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무한정 제공되었는데도 그의 황금 접시에는 빵 한 조각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파르치팔은 하급 기사인 자신에게 왜 이렇게 분에 넘치는 환대를 해주는지, 그리고 어부 왕은 왜 저런 고통을 받는지, 그리고 연회에서 연출된 이상한 장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더라도 호기심을 드러내거나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기사도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날의 연회는 끝이 났고 다음 날 파르치팔은 전날과 달리 황폐해져 버린 성을 아무런 소득 없이 나서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현인 아다파와 성배의 기사 파르치팔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다파는 에아의 조언에 따라 천상의 음식과 음료를 취하지 않았다. 파르치팔은 기사도에 따라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일견 이들의 행동은 올바른 것 같다. 한 사람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조언을 따랐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규범을 준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부작위(不作爲)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아다파는 천상의 음식과 음료를 거부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파르치팔은 한 번만 질문했더라도 어부 왕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고 자신도 원했던 성배를 찾을 수 있었다.
아다파는 현인이니만큼 ‘생명’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음식과 음료를 대했을 때 한 번쯤 신의 조언에 의심을 품거나 주변의 다른 신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예사 음식이나 음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르치팔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그에게 공감과 연민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기사도의 규범을 어긴다 할지라도 필요한 질문은 했었어야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 준칙이 되는 조언과 신념을 의심 없이 기계적으로 따름으로 부작위의 우를 범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후에 안일하게 내릴 수 있는 평가에 불과하다. 이들의 처지에 놓였더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 역시 쉽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처럼 까다로운 작위와 부작위 사이의 딜레마에서 필요한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신의 (교활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혹은 기사도라는 규범문화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는 안전한 충고나 전례보다 자신의 분별력과 판단에 따를 수 있는 대담함과 신념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원칙이나 규범을 따르는 것이 맞지만 상황이 비상하고 엄중할 때에는 이런 자질이 요구된다. 정답은 없고 결과는 알 수 없다. 이때 필요한 자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최선을 다했으나 역부족일 때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도움을 청한다면 도움의 손길은 있기 마련이다. 도움을 청하는 것까지가 정말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온갖 답답하고 부조리한 상황에 짓눌려 이 딜레마를 떠올려 보았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