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스님께서 통도사 주지였을 때 범어사에서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관조스님과 함께 통도사에 들러 인사를 올렸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관조스님은 속세 인연으로는 나와 친척지간으로 주지스님이 도자기 굽는 일에 관해 알아볼 일이 있다고 그 방면에 지식 있는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까닭으로 관조스님과 함께 통도사를 방문했다.
그때 주지스님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승복은 입고 있었으나 저-사서삼경(四書三經)의 교양이 몸에 깊숙이 배어든 백면서생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대면에서 장시간 도자기 굽는 일에 관해 질문받았는데, 질문의 요점을 간추리면 한마디로 실학파적 실사구시의 이념이 맥으로 잡히는 내용들이었다. 대화를 마친 후, 스님이 먹을 갈아 행서로 한시를 일필휘지하는 순간 번득이는 스님의 예술적 기예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유일한 자존심은 통도사에 들어와 강원을 졸업한 후, 바로 강사로 임명됐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한자로 된 경장(經藏)의 내용을 풀이할 수 있는 문리(文理)가 난 승려들이 승가에는 드물었다. 그러므로 스님이 통도사 선원에서 강의했던 사실은 어쩌면 불교 승려로서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인품에 관해 거론할 때는 필수적으로 유교적 교양의 품위를 앞세워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스님은 통도사 말사인 사명암 공지에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 가마를 짓고 불을 지펴 끽다(喫茶) 용구와 달항아리 등 생활 용기를 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도자기의 성형 표면장식 소성방법 등 과정마다 각각의 기법에 심취해 드디어 불가의 용어로 삼매경에 들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의 공예적 수업의 장은 주로 일본 문화의 전통적 중심지인 교토와 가나자와의 학계와 교류하면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동양의 전통적 공예학의 주류인 도자기 염색 옻칠의 기법을 연구함으로써 공예 분야의 기법을 종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종합적 모습이 바로 스님의 ‘불가의 도’ 혹은 ‘참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일본 열도의 공예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공예는 유럽제국의 선진된 공예와 조우하면서 산업혁명 이후 보다 발달된 차원의 독일 도자기 마이센 기술을 수입하였다. 따라서 일본이 개발한 공예기법들은 20세기 말엽에 와서는 유럽 선진국들의 기술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의 도예가들이 주로 사용했던 가마는 디젤이나 석유연료를 버너로 불을 지피는 원초적 단계였다. 교토의 기요미즈(淸水) 도자기마을에서 전기 가마를 개발한 전문가 요시카와(吉川) 씨를 대면하던 시간, 스님은 서슴지 않고 묘용(妙用)의 순간을 거머 잡게 된다.
통도사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란 탑이 있어 그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것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성파(性坡)스님의 개인적 소견은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에 불상이 없는 것은 그렇다 해도 팔만대장경이 통도사 지경 안에 존재할 때 통도사가 더욱 빛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서운암에서 야생화인 할미꽃을 재배한다든지 된장을 장독에 숙성시킨다든지 하는 그의 모습에서 소년 시절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이런 정서를 참고하면 팔만대장경의 고향, 합천에 대한 유소년 시절의 향수는 스님 의식 저변의 지배적인 화두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역시 스님이 짊어져야 할 또 하나의 화두이었음에 틀림없었으리라.
출가하기 전에 인생을 걸었던 유학의 사서오경과 통도사로 출가한 이후부터 심중에 남아있던 팔만대장경이 오버랩 돼 통도사 법당에 불상이 없는 대신 삼장(三藏)인 팔만대장경이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함을 의식하고 실행에 돌입했던 것은 아닐까? 스님은 1980년대가 끝날 무렵 기동력 있는 최첨단 대형 전기 가마를 서운암에 설치했다. 스님은 예술적 성향을 본질로 하는 승려다. 출가한 지 20년 만에 조형예술 장르 가운데 공예적 기법들 중 도예 염색 옻칠의 기법을 화두로 정진하였다. 결과적 산물로 도판(陶板) 16만 장을 제작하여 판화기법의 일종인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텍스트 그대로를 도판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실로 4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생산적 선(禪)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상서로운 구름이 감도는 서운암 뒷동산에 장경각을 건설하고 목재 부분을 영구화하기 위해 옻칠로 도장하는 대공사도 성공리에 마쳤다. 고려시대 나무판에 글을 새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유기물이기 때문에 몇천 년 후, 공기 중에 산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도판으로 만들어진 통도사의 16만 대장경은 1250℃에서 구워진 흙 판이기 때문에 우주공간에서 지구가 사라질 때까지 모뉴멘탈 한 불교의 기념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