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멀어질수록 그리워진다. 돌아오기 힘든 길이라면 향수는 더욱 짙어진다. 723년께 인도로 유학을 떠났던 신라 승려 혜초가 그랬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려보낸 ‘안서(雁書)’ 고사를 인용해 쓴 시에서 그의 고적한 처지가 오롯이 드러난다. 안서의 주인공인 한나라 장군 소무 역시 흉노 땅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간 억류됐으니, 향수가 절절했을 것이다.
태어나서 자란 곳만이 고향인 건 아니다. ‘제2의 고향’이란 말이 있듯이, 세계 어디든 살다 정들면 그곳이 고향이 된다. 따라서 향수와 애향심에도 지역이나 국적 제한이 없다. 좋은 예가 백광숙이란 한국 이름을 가진 독일 출신의 루미네 수녀다. 그는 1989년 부산 동구와 부산진구에 걸쳐 있는 ‘달동네’ 안창마을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단칸방 판잣집을 구해 유아와 청소년 등 12명을 돌보며 살았다. 2008년 오세아니아 마셜제도로 선교활동을 떠나기 전까지 그렇게 산 세월이 19년이다. 2017년 휴가를 내 안창마을을 잠시 방문한 루미네 수녀는 “내 고향은 마셜제도도 독일도 아닌 한국 안창마을”이라고 했다.
안창마을에는 루미네 수녀 같은 이가 많다. 6·25 전쟁 피란민에 의해 형성된 무허가 판자촌이 마을의 기원인 데다, 주거비용이 저렴하고 도심에서 가까워 부산으로 이주한 외지인들이 선호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안창마을 근처에는 신발업체와 부두 등 일자리가 풍부했다. 그곳 노동자들은 안창마을을 비롯한 고지대 판자촌에 둥지를 틀고 성공을 꿈꿨다. 보름달이 뜰 때면 저지대보다 달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축복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랬기에 안창마을 출신자들의 고향 사랑은 각별하다.
식목일을 맞아 안창마을 출신자들이 선물한 매화나무를 고향에 심는다고 한다. 그들의 고향 사랑이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로 무럭무럭 자랄 것을 생각하면, 고향에 보내는 선물 중에 나무 만한 게 있을까 싶다. 부산진구가 선물 받은 나무를 쇠퇴해가는 안창마을을 ‘친환경 생태마을’로 가꾸는데 활용한다니 뜻이 한층 깊어진다. 나무를 선물한 이들은 앞으로 안창마을을 더 자주 찾을 것이다. 그들의 후손이 안창마을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관계의 확장 속에 마을은 재생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은 도시를 살리는 강력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