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엔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의 사진이 무슨 위인들처럼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 있는 집이 많았다. 지금은 이해가 잘 안 되지만 하여튼 지휘자가 이런 대중적인 인기가 있을 때가 분명히 있었다. 소위 1970~1980년대에는 클래식도 나름의 전성기였다. 젊은이들은 음악다방을 많이 다녔고 시내 중심가엔 음반가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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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그런 클래식 붐의 선두에 지휘자가 있었는데, 미디어와 음악 산업이 낳은 새로운 스타였다. 영화 ‘오케스트라 리허설’의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는 지휘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상적인 지휘자는 키가 크고 잘생기고 얼굴은 창백하면서 고압적이고 신비한 마력이 있어야 한다. 표정은 고뇌로 가득 차고 연기력을 갖춰야 한다.” 대중이 어떻게 지휘자를 바라보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전문지휘자는 음악의 규모가 커진 낭만시대에 와서야 나오게 되었다. 작곡가 멘델스존이 대표적인 지휘자였고, 바그너 말러 등도 작곡가와 지휘를 겸했다. 그러나 음악의 전권을 지는 근대적인 의미의 지휘자는 역시 20세기에 와서야 제대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토스카니니 등이 대표적이다. 토스카니니의 데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단이 ‘아이다’를 공연할 때 갑자기 지휘자가 병이 나버렸고 이때 19세의 젊은 첼리스트인 토스카니니가 악보를 모두 암기한 채 그대로 아이다를 성공적으로 지휘를 해버린 것이다. 이후로 그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 행보를 이어가게 된다. 그는 음악의 해석에서도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래서 연습할 때 워낙 ‘노’라고 자주 말해서 별명이 ‘토스카노노’였다고 한다. 뉴욕방송협회는 이 대가의 레퍼토리를 음반으로 남기기 위해 NBC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데 개인을 위한 이런 창단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카라얀은 30세에 베를린필을 지휘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다. 카라얀은 특히 LP에서 CD, LD, 뮤직비디오까지 음반산업의 발전사와 함께 한 지휘자이다. 그는 기계를 좋아하고 공대를 다녔던 이력이 있다. 그의 이런 취향이 특히 음반사업에 잘 맞았는지도 모른다. 카라얀이 전성기 때의 일화다.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행선지를 묻자 그는 “어디든 상관없어요. 난 어디서든 할 일이 있거든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야심만만한 카라얀도 나치 부역으로 지탄을 받았고, 또 최초의 여성단원 자비네 마이어의 입단에 따른 베를린필 단원들과의 불화 등 구설수도 많았다. 그러나 카라얀 재단과 센터를 세웠고, 지휘콩쿠르를 통해 많은 후배 지휘자들을 발굴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클래식 대중화의 일등공신이었다. 20세기 음악을 카라얀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제왕적인 지휘자들도 클래식과 음반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그 위상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이런 원인의 또 하나로 오케스트라 노조의 발달을 꼽는다. 단원들의 권한과 복지는 강조되고 지휘자의 권한은 축소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최근 세계 오케스트라의 추세는 평준화다. 각 오케스트라의 개성은 떨어지고 어떤 지휘자가 와도 비슷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어쨌든 카리스마의 지휘자들은 점점 전설이 되어 가고 요즈음의 지휘자들은 친절하고 세련됐다. 최근 LP붐이 다시 일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아날로그 음향을 그리워하는 것도 있지만 이전의 전설적인 명연주를 다시 듣고 싶은 이유도 분명히 있다.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이다. 이 어쩔 수 없는 쓸쓸한 퇴영의 계절에 다시 못 볼 마에스트로를 그리워하며 카라얀이 지휘하는 브람스의 교향곡을 들어보려고 한다.
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