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까지 봉화(烽火)는 외적 방어에 활용된 중요 통신 수단이었다. 봉화를 피우는 곳을 봉수대(烽燧臺)라고 불렀다. 많을 때는 643개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봉화를 이용한 것은 동서양이 비슷하지만, 동양의 기록상 기원은 중국 주나라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포사와 가짜 봉화’ 이야기다.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된 유왕은 후궁으로 들인 미녀 포사를 웃게 하려고 가짜 봉화를 자주 피우게 했다. 그런 어느 날 견융족이 실제로 침입해 봉화가 올랐지만 제후들은 아무도 유왕을 돕지 않았다. 그 바람에 유왕과 태자는 붙잡혀 처형됐고, 서주는 멸망했다. 동양판 ‘양치기 소년’으로 잘 알려진 일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봉화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가락국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기 위해 신하로 하여금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를 횃불로 안내케 했다는 것이다. 봉수제도의 전국적 완성은 조선 세종대왕 때 이뤄졌다. 세종대왕은 각 도의 망 보기 좋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약 12㎞ 간격으로 설치했다. 또 연대(煙臺)를 4개에서 5개로 늘리고, 전국의 봉수 노선을 1로(路)에서 5로(路)로 세분했다. 1·3·4로는 북쪽 노선, 2로와 5로는 해상 경계를 위한 남쪽 노선이었다. 경상도 쪽인 2로는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 출발해 초량의 구봉봉수대, 황령산봉수대, 계명봉봉수대 등을 거쳐 5개 노선의 ‘종착역’인 서울 목멱산(현 남산) ‘경봉수(京烽燧)’까지 이어졌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기능이 완전 폐기된 봉수대는 1971년 현대적 통신기지로 탈바꿈했다. 경봉수가 있던 서울 남산에 방송 및 전화전신 송신탑 기능을 하는 남산타워가 섰다. 이후 남산타워는 전망대 및 상업시설을 확충하고 케이블카와 어우러져 서울의 관광 랜드마크 기능까지 겸하게 됐다.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2021년 8월 부산 황령산봉수대도 변신의 계기를 맞았다. 지난 19일 부산시와 대원플러스그룹이 주·야간 조망과 박물관 체험장 역할까지 겸하는 ‘황령산 봉수전망대’ 조성 업무협약을 맺었다. 봉수대 자리에 2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부산지형을 본 딴 전망시설을 설치, 일본 하코다테를 능가하는 세계적 조망관광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시민·환경단체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지만, 오랜 세월 외적 경계 역할만 한 황령산봉수대가 외국관광객을 모을 부산의 랜드마크로 거듭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