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개구쟁이였던 나는 걸핏하면 여기저기 다치고 곪기 일쑤였다. 살이 벗겨지면 빨간약(머큐로크롬)를 발랐고, 그 자리가 곪으면 부모님께서 손으로 짜셨다. 희누른 고름과 알갱이 같은 심지가 빠지고 구멍이 휑하니 뚫리고 그 자리에 ‘다이아찡’ 가루약이 뿌려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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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기자 |
다이아찡의 정확한 이름은 설파다이아진으로 설파계 항생제다. 우리가 페니실린 하면 자연히 플레밍을 떠올리지만, 설파의 아버지인 도마크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오늘 소개한다.
독일사람인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 Domagk: 1895~1964)는 대학생 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애국심에 들떠 자원 입대했다. 동부전선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했는데 군의관이 제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수술 자리에 감염이 생기면 부상병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도마크는 그때 감염병 치료를 필생의 목표로 정한다.
의사가 된 후 제약회사에 입사해 감염병 치료제 연구를 시작한 도마크는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1932년에 감염병 치료제인 프론토질을 개발한다. 페니실린 보다 앞서 나온 감염병 치료제였다. 효과는 놀라웠다. 백약이 무효였던 상처 감염이 기적처럼 나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으니. 도마크의 성공은 1939년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되어 보답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이 영예가 그에겐 가혹한 고통이 되었다. 당시에 히틀러는 반체제 인사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가 괘씸하여 모든 독일인에게 노벨상 수상을 금지했다. 그런데 도마크가 수상을 거부하는 편지를 망설이자 비밀경찰이 그를 끌어 가고 만다. 결국 수상 거절 편지에 강제로 서명하고 풀려나긴 했지만 이 일은 두고두고 상처로 남는다.
그러는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도마크는 부상병들이 현장에서 바로 상처에 뿌릴 수 있는 설파제 가루를 개발했다. 독일군은 물론이고 연합군도 비슷한 약을 썼다.
하지만 일본군에겐 설파제가 없었다. 일본군을 괴롭히는 세균성 이질에도 설파제가 잘 들어 이를 구하기 위한 일본군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심지어는 수용소에 갇혀 있는 연합군 포로들에게 원하는 물품과 설파를 맞바꿀 정도로 설파제에 지극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연합군 포로들은 가짜 약을 넘겨주어 일본군을 골탕 먹였다. 일본군들은 그 유명한 설파제가 왜 자기들에겐 안 듣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광복 후에 우리나라에도 설파제와 페니실린이 들어왔다. 미군 보급물자 형태로 들어왔던 약들이 대부분 그렇듯 암시장으로 흘러나와 비싸게 팔렸다. 하지만 언제나 공급이 부족해 일본 제약사가 만든 약들이 밀수로 암시장에서 유통된다. 이것이 ‘다이아찡’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인 1947년, 도마크는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되어 뒤늦게 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페니실린 세상이었다. 설파계 약물은 3000~4000개나 나왔지만 그 무렵에는 내성 문제로 힘과 명성을 많이 잃었다. 1950년대에 ‘설파~’는 거의 다 퇴출되고 항생제 처방전은 ‘~실린’과 ‘~마이신’으로 채워졌다. 그렇다면 수많은 설파제는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졌을까? 아니다. 면역억제 환자들에게 생기는 희귀한 폐렴, 화상 크림, 비뇨기감염병 치료제, 당뇨병 치료제로 쓴다. 하지만 많은 양은 축산업계로 가는 듯하다.
지난해 연초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아프리카돼지열병(ASFV)으로 살처분 돼지들을 매장했던 곳에서 누출된 침출수에서 설파제를 비롯한 항생제들이 높은 농도로 검출된다고 한다. 인간 의료 현장에서 사라진 설파제가 지금도 꾸준히 생산되어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반갑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축산업계의 항생제 남용을 걱정한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전세계 항생제 생산량의 4분의 3은 축산업계에서 쓴다고 한다. 가축 몸에 들어간 항생제는 결국 사람 몸 속에 들어오는데, 처방전에서는 퇴출된 설파제를 지금도 우리가 섭취하고 있는 셈이다. 설파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다.
신경과전문의·메디컬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