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빌자면, ‘내 고장 7월은 치자꽃이 활짝 피는 시절’이다. 동네어귀 마다 새하얀 치자꽃이 그득하다. 굵은 장맛비 속에도 더없이 달콤한 ‘마성의 향기’를 뽐내듯 뿜어낸다. 치자꽃 향기의 매력은 그저 ‘치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 계절 치자꽃을 보면 떠오르는 미국의 흑인 여자 가수가 있다. 흔히 ‘고흐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 간’ 가수로 불리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1915~1959)다. 3대 여성 재즈 가수 중 한명으로 꼽히는 그녀는 무대에 설 때마다 치자꽃 한송이를 머리에 꽂곤 했다. 사람의 감정과 영혼을 뿌리부터 흔드는 듯한 특유의 호소력 짙은 음색과 창법은 치자꽃 향기 만큼이나 치명적인 매력으로 청중들을 중독시켰다.
그녀의 명곡 중 단연 최고로 평가되는 곡이 ‘Strange fruit(이상한 열매)’라는 곡이다. 1939년 당시 뉴욕에서 흑인이 설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던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처음 불렀고, 앨범으로 제작돼 100만 장 이상 판매됐다. 이 노래는 원래 1930년대 남부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에서 출발했다. 살인과 유부녀 강간 혐의를 받은 흑인 남성 2명을 백인들이 집단폭행하고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아 공개 처형한 것이다. 무고함은 밝혀졌지만, 책임진 백인은 없었다. 당시의 야만적이고 처참한 광경을 담은 사진을 통해 이 노래가 탄생했다. 이상한 열매는 다름아닌 나무에 매달린 흑인 2명의 시체였다. 이 노래는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가요’로 물밑에서 불렸고, 빌리 홀리데이가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이후 세상이 뒤집혔다.
빌리 홀리데이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지에 사진이 실린 최초의 흑인이다. 나아가 타임지는 1999년 말 이 노래를 ‘20세기 최고의 노래’로 선정했다.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정신을 통해 미국 사회의 집단적 반성과 변화를 가져온 ‘시대의 노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잇따라 출마선언에 나선 여야 차기 대선 예비후보들의 비전과 정책에 ‘차별 철폐’가 보이지 않는 점은 극히 유감이다. 민주당 김두관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밝힌 것이 거의 유일하다. 차별과 혐오 문제가 우리 사회가 해결할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인가? 앵무새처럼 ‘공정’만 외치고 있기엔 시대정신을 읽는 시각이 너무 협소한 것 아닌가?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에게 ‘치자꽃 필 무렵’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