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 전 어느 날, 박제가가 정약용의 집을 찾았다. 박제가가 열두 살 위다. 약용이 동생, 잘 지냈나? 자네 귀한 책을 손에 넣었다지?/네, 청나라에서 입수한 ‘정씨종두방’ 말씀이군요/종두에 관한 처방이니 두창(천연두) 예방법이 있을테지? /일전에 제가 ‘강희자전’을 보니 청나라에서는 ‘종두법’으로 두창을 예방한다길래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 책은 조금 더 그 내용이 소상히 나오긴 합니다/두창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 태종 세종 현종 선조 임금님의 대군들과 공주님들도 두창으로 세상을 뜨셨지, 백약이 무효란 말이야/청나라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지만 황실 차원에서 관심이 크다합니다./그렇지, 황실에 전문 의사를 두었다더군. 그리고 두창을 앓고 살아남아야 황위 계승자 반열에 올린다하네/그나저나 형님, 이 책만으로는 당장 종두법을 우리가 해보긴 어렵습니다/그럴 줄 알았네, 여기 내가 가져온 이 책을 보게/‘종두요지’란 책이네요?/내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을 때 청나라에서 들어온 책에 종두법 이야기가 나오길래 요약해둔 걸세/형님도 종두에 관심이 많으시군요!/그래 이 둘을 참고해 속히 정리해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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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기자 |
1799년에 있었을 두 사람의 대화를 필자가 상상해보았다. 이듬해인 1800년에 정약용은 두창을 앓은 환자의 고름 딱지를 이용해 예방접종을 하는 인두 접종법을 정리한 ‘종두방’을 펴냈다.
18세기 중반에 전세계를 휩쓴 두창 앞에 은둔의 나라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나라에 실용적인 예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안 조선의 실학자들은 관련 서적을 입수하여 인두 접종을 연구했다. 이렇게 정약용이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박제가는 자신의 임지인 경기도 포천에서 첫 접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의 유의(儒醫)였던 이종인에게 전수하여 다수에게 시술하여 성공하기에 이른다.
10세기에 중국에서 시작된 인두법이 수백 년 만에 조선 땅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1801년에 신유사옥(박해)이 일어나면서 세 사람은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고 어렵게 싹을 틔운 인두 접종도 동력을 잃고 만다. 그러는 사이 1796년 영국에서 시작된 제너의 우두 접종법이 조선으로 성큼 다가선다. 모든 ‘백신’의 원조가 될 우두 접종은 1805년 중국 광뚱(홍콩), 1828년에 베이징, 1861년에 상하이에 보급된다. 아마 조선은 북경을 드나드는 사신들 아니면 천주교 신부를 통해 우두법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중국의 인두 접종법을 연구했던 정약용은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제너의 우두 접종법도 연구해 그 내용을 ‘마과회통’에 추가한다. 제너의 우두법이 나온 지 20~30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정약용이 실제로 백신을 접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신선한 두묘(백신)를 구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정약용에게 백신을 건네 준다면 지석영보다 반 세기나 빨리 우두법이 보급될까? 역시 어려울 것이다. 왜? 정약용의 정치적 입지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백신을 구할 길은 청나라나 천주교였다. 청나라 문물을 개인적으로 들이는 것은 정부가 금지하고 있었고, 천주교와 연루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정약용 일가는 이미 천주교와 관련하여 풍비박산된 상태이고 자신도 18년 유배를 당한 처지였다. 그런데 서양학문의 결정체인 백신을 그가 내놓았다? 정파적 이익 때문에 그를 배척하고 목숨까지 빼앗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창에서 백성을 구할 방법인(지금도 그렇다) 백신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 정약용은 서양 이야기는 지우면서 조심스럽게 백신의 내용을 책에 실었다. 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백신 접종자가 90만 명을 넘어섰다. 여전히 백신에 대한 근거 없는 의심 때문에 접종을 망설이는 사람이 많다. 다른 나라 정부들도 백신 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백신을 확보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맞으면 안 될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백신을 보급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200년 전 절실했던 바람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면목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신경과전문의·메디컬티스트